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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하루만 Oct 02. 2018

시가가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다

동태 전을 부치느라 힘든 건 아니었다.

시가가 불편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다.


뭉뚱그려 싫어하기보단, 뭣 때문에 시댁만 생각하면 답답하고 불편한 지, 두드러기가 생기고 먹기만 하면 체하는지, 명절이 있는 달력은 아예 찢어버리고 싶은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조목조목 따져보고 싶었다

현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년 반복되는 상황이 지긋지긋해서다. 남편은 일 년에 2번밖에 안 되는 명절인데 왜 그렇게 싫어하냐며 속 터지는 소리만 해대니, 남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명절 끝나고 보복하듯 쇼핑하면 나아진다지만, 난 그게 안 통한다. 더 서글퍼졌다. 


내 시간 내 마음, 내 인생인데! 시가 사람들은 내 시간과 내 노동력이 자기 것인양, 나한테 뭘 맡겨놓은 듯 항상 바라기만 하는지 이젠 역겹기까지 하다. 친정부모님은 내 남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신다. 남편이 우리 부모님께 일 년에 한두 번 전화해도 그저 고맙다고 하신다. 며느리인 나는 시어머니께 일주일에 2~3번 전화를 드려도 '넌 다 좋은데 왜 전화를 자주 안 하냐'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지. 나는 왜 그런 말에 죄송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나를 구원해준 사람들도 아닌데. 이 상황을 앞으로도 계속 견뎌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싶었다. 

시가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더 이상 바뀌길 바라지 않겠다는 오기와 내 시간과 내 인생이니까 스스로 '내 행동'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으로 조목조목 따져봤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1. 누군 놀고, 누군 일하고


5가지의 전을 부치느라 쪼그리고 앉아 있다 보면, 시가의 친척이 한분 두 분 오신다. 밀가루 묻은 손을 닦고 그분들을 위한 술과 과일, 안주상을 본다. 또다시 앉아 전을 부친다. 기름이 튄다. 따끔하다. 기름이 튀어 따끔한 손등을 살피는 대신, 프라이팬에 있는 전들을 살핀다. 그새 타진 않았을까 싶어서. 어느새 저녁때가 돼서 식사 준비를 한다. 이어지는 설거지, 후식까지 드리고, 또 명절 음식 준비를 한다.


하루 10시간을 꼬박 부엌에만 있던 탓에 머리카락 하나하나에 기름내, 밥 내, 반찬 내가 뒤섞여 베었다. 한데 섞인 냄새에 지칠 때쯤 송편을 빚는다. 시어머니가 조금만 하라고 내어 준 송편 반죽은 어른 머리통 5개는 더 돼 보인다. 그렇게 밤이 깊어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


하루 종일 부엌이라는 외딴섬에 갇힌 기분이 든다. 그 노동 자체가 힘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혼자만 하는 노동에 대한 외로움과 억울함 때문에 힘든 거다. 웃으며 '작은 아버님 도와주세요! 남편 같이 합시다~'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쟤 왜 저러냐'라며 어이없어하는 표정뿐. 외계인 쳐다보는 눈빛 같았다. 엉덩이를 붙였다 바로 떼며 동창들 만나러 간다는 남편의 모습은 얄밉기까지 하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논다. TV 보고, 술 먹고, 정치 얘기에 열을 올린다. 


서로 도와가며 고마워하고 힘들면 좀 쉬면서 하라고 격려도 하면서 다 같이 하는 노동이고, 남편도 내 친정부모집에서 똑같이 전을 부치고 제사음식을 한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할 수 있다. 외롭진 않을 것 같다. 이런 줄도 모르고 결혼을 선택한 나를 원망하지도 않을 것 같다.


<더 셰프>의 아담 존스 대사


 

2. 빼앗긴 자유


반드시 명절 이틀 전에는 가야 하고. 명절 당일 날은 기어코 점심까지 해 드려야 되며, 동네분들의 술상까지 보고, 뒤 정리를 끝내며 오후 5시는 넘어야 가도 된다는 암묵적인 사슬이 있다. 그 자체가 힘든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다.


내 선택이 아니라서 불편한 거였다. 내 몸, 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고 가고, 자고 안 자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기대와 바람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붙잡고 있어서다. 감옥도 아닌데 왜 자유를 뺏긴 걸까? 느리해방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슬기로운 감방생활> 캡처



3. 매년 무한반복이다. '퇴가'가 불가능하다.


아는 동생이 요즘 '퇴사'가 유행이라며 본인도 해보겠다고 약간 불안해하며 얘기한다. 순간 내가 느 건 부러움이었다. '저 아인 선택의 자유가 있구나. '퇴사'를 할지 말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네. 박대리라는 역할을 끝낼 수도 있겠구나 네가 원하면.'  


며느리는 '퇴가'가 불가능하다. 며느리 역할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혼이다. 아이가 있을 경우엔 그 '방법'이 꽤나 무겁고 아픈 거라 쉽게 하지 못할 뿐이지. 며느리 사표를 냈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대로 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나의 시가 상황에선 어림도 없을 처방전이다.




4. 예상치 못한 역할의 부담


남의 집 제사 지내려고 결혼한 사람이 있을까? 시어머니의 대타 노릇을 하기 위해 결혼한 사람이 있을까? 최소한 나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가에선 시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기 바란다. 당신들의 늙음을 무기 삼아 며느리에게 있을법한 측은지심을 쿡쿡 찔러대며 당연히 해야 한다 말한다. "얘, 아가 이번 명절은 너네 집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니? 니 시어머니 아프시다" '아프시면 저희 친정부모님처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고 제사를 좀 정리하시면 될 텐데요'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회사에서 역할이 많아진다는 건 직급이 높아지는 경우나 연봉과 관련 있다(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며느리 역할은 아무리 하는 일이 많아져도 직급이 높아지거나 페이는커녕 거절할 경우, 가차 없이 무례함을 답례로 준다. 



5. 성차별


손자 이름만 부르신다. 손자에게만 말을 건다. 남자만 사람이라 하신다. 손가 자신도 이쁨 받고 싶어 곁에 가면 '넌 이름이 뭐냐?'라고 몇 년째 되물으신다. 치매는 아닌 것 같은데. 

설거지 하려고 싱크대 앞에 선 남편에게 미쳤다고 욕하신다. 어디 남자가 손에 물을 묻히냐면서! 명절 땐 친정 가는 며느리는 ㅆㅂㄴ이라 소리 지르신다. 어디 여자가 친정엘 가냐고~ 




조목조목 따져봤으니 앞으로 어디로 향해갈지, 어떻게 살지 정해야겠다. 내 인생이니까..




* 메인 커버사진: <당신이 허락한다면 난 이 말하고 싶어요> 김제동 지음.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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