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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Apr 22. 2024

시간의 꺼풀

(여자)아이들,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시간도 꺼풀을 가질 수 있을까.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르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의 시점에 여러 추억이 엉켜 있을 수는 있지만, 하나의 시점을 여러 번 반복하며 같은 시간에 여러 꺼풀을 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저녁에 그와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당신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그러나 시간을 다루는 여러 창작물 중 타임 루프(Time-loop)는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몇 번이고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무수한 선택의 분기점을 돌며 펼쳐지는 이야기들. 우리가 종종 느끼는 기시감은 익숙할 수 없는 상황이 익숙하다는 역설 속에서 혹 내가 무언가를, 나 모르는 사이 쌓인 시간의 꺼풀을 잊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기에, 이 루프의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루프를 동력으로 삼은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목표를 두고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 루프에서 빠져나가는 것

둘, 루프를 통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것(누군가를 살리거나, 사고를 막거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는 두 번째에서 첫 번째로 목표를 변경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의 꺼풀을 쌓아올린 두 사람의 이야기다.






(여자)아이들

ㄴ〈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2024, 2ND ALBUM '2')












오늘도 아침엔 입에 빵을 물고
똑같이 하루를 시작하고
온종일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피곤해 죽겠네

지하철 속 이 장면 어제 꿈에서 봤나
아참 매일이지 지나치고
바쁜 이 삶에 그냥 흔한 날에
그 애를 보고 말야

평온했던 하늘이 무너지고
어둡던 눈앞이 붉어지며
뭔가 잊고 온 게 있는 것 같아
괜히 이상하게 막 울 것만 같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생각은 딱 질색이니까

카페인으로 잡은 정신은 빠졌고
하루 종일 신경 쓰여 토할 것 같아
저녁이 돼도 배고픔까지 까먹고
그치 이상하지 근데 말야 있잖아
처음 본 순간 뭐라 할까 그립달까
나도 웃긴데 말야

평온했던 하늘이 무너지고
어둡던 눈앞이 붉어지며
뭔가 잊고 온 게 있는 것 같아
괜히 이상하게 막 울 것만 같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생각은 딱 질색이니까

오랫동안 나를 아는
슬픈 표정을 하고 Oh
흔적 없는 기억 밖
혹 과거에 미래에 딴 차원에 세계에
1 2 3 4 5 6 7 8

평온했던 하늘이 무너지고
어둡던 눈앞이 붉어져도
다시 놓쳐버리는 것만 같아
괜히 이상하게 막 울 것만 같고
그냥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생각은 딱 질색이니까
아냐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1.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걸 


곡의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기시감이다. 그것도 그냥 익숙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시하려 애쓰고 고개를 돌리려 기를 써야만 겨우 못 본 척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시감. 아무리 익숙한 풍경이라고 되뇌고, 바쁘고 흔한 날의 일부라 생각해도, 토할 것 같을 정도로 신경 쓰게 하는 그 사람. 순식간에 "평온했던 하늘이 무너지고 어둡던 눈앞이 붉어지"는 순간은 그저 기시감이 될 수 없다. 분명 '나'와 '너'는 여기서 처음 마주친 것이 아닐 것이다. 그저 마주쳤을 뿐인데 '나'는 "괜히 이상하게 막 울 것만 같고", 그리움까지 느낀다. 넌지시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분명 '너'를 사랑했을 거라고. 지금 '나'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흔적 없는 기억 밖" 어딘가에서  분명 '너'를 사랑했을 거라고. "오랫동안 나를 아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너' 또한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수히, 어쩌면 셀 수 없을 만큼.


곡의 가사만 보자면 '나'는 루프를 기억하지 못하고 '너'만이 반복되는 시간을 기억하며, 계속해서 나를 구하러 오는 것만 같다. 그런 '너'와 무수히 작별할 때마다 '나'는 '너'를 무수히 잊었을 것이고. 그러나 문득, "생각은 딱 질색"이고, "아픈 건 딱 질색"이라고까지 힘주어 말하며 '너'를 잊으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이번 루프 직전 회차까지 모든 걸 기억한 채 '너'를 구하러, '너'를 한 번만 더 만나러 달리던 게 '나'였다면?



2. 이제는 그만두고 싶을 만큼


보통 루프물의 주인공들은 반복되는 시간에 존재가 닳아가면서도 누군가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로, 너무 많이 반복했는데도 원하는 결말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몇 시간 혹은 하루를, 또는 며칠을 죽어라 반복해도 만나게 되는 건 자꾸 죽어버리고 사라지는 당신이라면.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의 '나'는 어쩌면 루프의 시작부터, 이번 회차 직전까지 '너'를 구하기 위해 애써왔을지도 모르겠다. '너' 하나를 위해 몇 번이고 반복했으나, 변하지 않는 결과를 앞에 두고, 스스로 이름조차 잊을 만큼의 시간을 뒤로 한 채 루프에서 떠나기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만두고 싶을 만큼 사랑하고 만 것이다. 너무 사랑했으니, 이제는 그만 아프고 싶다고 토로할 만큼.


그러나 루프는 끝나지 않아 다시 한 번 반복이 시작되었다. 이번 루프에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너'는 이제 모든 것을 안다. 무수한 시간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너'는 몇 번이고 '나'를 잊었다는 슬픔을, '너'를 위해 '나'가 얼마나 헤매왔는지를. 그 기억을 모두 끌어안았으니, '너'는 당연히 "오랫동안 나를 아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완전히 뒤바뀐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언제 다시 뒤집힐지, 혹은 나란히 기억하며 서로를 끌어안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반복되었고, 입장을 바꿔 현재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시간의 꺼풀을 헤아리면 "아픈 건 딱 질색"이라고 말하는 '나'의 아픔이 얼마나 크고 짙은지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부디 이 끝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라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지나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뒤돌아서 달려와 '너'의 이름을 물을 것 같으니까. 수없이 반복해온 사랑을,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독했던 사랑을 완전히 내던지는 결말은 '나'에게 허용되지 않을 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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