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시작은 살기 위해서였다. 우리 모두 젖을 빨지 않으면 죽는 시기를 거쳤다. 그 시기에는 먹고, 자고, 싸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그것만 잘해도 큰 칭찬과 사랑을 받았으니 삶의 이유라 할 만했다. 어른이 돼서 이유식을 먹어 본 적이 있다. 아무런 양념도 되지 않은 쌀죽에 잘게 조각을 낸 당근, 버섯, 소고기는 혀에서 몇 번을 굴려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전쟁 포로에게 배급되는 식량이 이런 맛일까 싶었다. 이 따위 맛이니 입안에 밥을 떠먹여 줘도 애들이 기를 쓰고 안 먹으려 드는 것도 당연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기 위해서 먹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먹기 위해 사는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생각과 대화가 온통 먹는 것뿐이다. 이 무렵엔 여럿이 모여 밥을 먹다보면 음식 얘기 말고는 딱히 할 얘기도 없다. 정치 얘기는 하다 보면 싸우거나 삐지거나 둘 중 하나다. 둘 다 밥맛을 떨어뜨린다. 종교 혹은 그 비슷한 얘기는 종교적 이유로 피하는 음식이 있는지 묻는 것 말고는 꺼내서도 안 된다. 일이나 재산 얘기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동년배일경우 자기 자랑으로 귀결됐고, 상사일 경우 좀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인지 훈계인지 비판인지 모를 말로 끝났다. 둘 다 피곤한 건 매한가지다.
밥을 먹으며 음악이나 영화 얘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공통의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진다. 취향은 한 번 굳어지고 나면 취향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해 진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 삑사리가 나면 실수지만 내가 싫어하는 가수가 같은 실수를 하면 가창력 부족이라고 야유를 보낸다. 그런 순간이 생길 때마다 원래의 내 취향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외부의 적이 있으면 내부의 단결은 공고해지니까. 모두가 같은 취향이라면 결국 같은 얘기를 반복하게 된다. 누군가 말을 꺼내면 '최고지', '그분은 전설이시지' 이런 말들이 몇 번 오간다. 하지만 전설들은 신곡이나 신작을 잘 내놓지 않는 탓에 결국은 옛 이야기를 하게 된다. 전설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골백번은 했다. 어딘가 김이 빠진다. 취향이 다르면 '좋지요', '저도 알아요' 이런 말을 예의상 두어 번 주고 받다가 김빠진 맥주나 홀짝거린다. 김이 빠지느냐 김빠진 맥주냐의 차이 뿐이다. 둘 다 썩 재밌지 않다.
이것 저것 제끼면 남는 건 먹는 얘기다. 게다가 뭔가를 먹으면서 먹는 얘기를 하면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뭔가를 제대로 느끼는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런 감각은 한여름에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오이를 아삭거리면서 먹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상 곳곳에도 비슷한 순간이 가득하다. 여름날 저녁 에어컨이 잘 나오는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 잔을 쭈욱 하고 들이킨다. 쭉하고 마시면, 즉각적으로 뒷머리가 찡하고 땡겨온다. 살아있다는 건 이런 거다.
어쩌면 먹기 위해 산다는 것은 뭔가를 먹을 때 빼고는 살아 있다는 걸 느끼기 어려워진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고기를 잘 굽는 법과 돼지고기의 부위별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각 부위별 조리법과 잘 하는 집, 개성 있는 집들에 대한 품평을 이어간다. 음식 얘기가 정치, 종교, 음악, 영화보다 좋은 건 취향에 대한 존중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비판은 없다. 취향은 존중해 주십시오. 한 마디로 모두가 그야말로 '해피'해지는 영역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핫플레이스가 있고 레시피가 있다. 설령 그게 라면일지라도. 어쩌면 그건 음식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추억에 대한 얘기인지도 모른다. 그때 함께 라면을 먹던 그날 밤에 대해서. 아니면 라면을 끓여 주던 그 사람에 대한. 그래서 음식 얘기는 소중하다. 괌에서 먹은 음식 이야기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