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닌 지 7년 차가 된 11월의 어느 날도 윤은 점심도 거르고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이제 대리 3년 차인 윤은 매출 비중은 작지만 꾸준하게 해외로 판매되는 제품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날은 윤이 담당하는 제품이 비행기 연착으로 미국 워싱턴주에 제때 도착을 못해 새벽 6시부터 미국 판매법인과 긴급하게 회의를 한 날이었다. 윤은 상사인 이 과장에게 보고를 하고 인근 캘리포니아주에서 재고를 실어 나를 수 있는지, 나를 수 있다면 언제 도착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모레 오전에는 윤의 조직을 담당하는 지상무가 미국 법인장과의 미팅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미팅을 준비하는 이 과장은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작성하는 일을 윤에게 맡겼고 내일 아침 9시에 자신에게 보고를 하라고 했다. 대충 바나나 하나와 커피로 배를 채운 윤은 보고 자료를 만드느라 정시 퇴근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했다.
저녁도 먹지 못했는데 시계는 어느덧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집에서 가져온 텀블러를 챙겨 들고나갔다. 텀블러에는 홍차가 담겨 있었다. 윤은 차를 즐겼던 엄마 덕분에, 그리고 거실 한 구석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엄마의 티테이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차를 가까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커피보다는 차를 좋아했다. 회사 밖을 나가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으니 공원이 나왔다. 공원 벤치에 앉았다. 배가 고프기보다는 마음이 고픈 것 같았다. 윤이 텀블러 입구를 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코를 가까이 대자, 홍차의 아릿하고 은은한 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는 한 모금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 덕분에 긴장되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윤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좋은 선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회사는 정년을 보장해 주는 회사였고 회사의 비즈니스 자체도 상당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만을 생각했을 때 윤에게 이 회사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결혼 상대를 만나지 못했지만 윤의 회사 이름 덕분에 윤은 종종 소개팅 제안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윤은 회사에서 보낸 7년여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삶을 온전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은 집에 놓아두고 몸만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돌아오면 영혼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3년 차부터는 자신의 영혼이 어딨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껍데기만 남은 채로 앞으로 30여 년을 이렇게 회사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답답했고 절망적이었다. 윤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기회로 인해 경제적인 여유를 잃고 결혼할 기회가 사라진다고 해도 한 번은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윤은 홀로 다짐하듯 말하였다.
“나 더 이상 이 일에 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나….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 수입이 줄더라도 말이야...”
그리고는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나 찻집을 해야겠어.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와서 차 한잔 마시고 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겠어."
그날의 다짐은 윤이 지루한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윤은 그대로였지만 윤의 마음은 달랐다. 한 해가 시작하면 휴일이 몇 개인지 세는 게 먼저였던 윤에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으니까. 윤이 계산해 보니 찻집을 시작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문을 닫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꽤나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윤은 절약하고 또 절약하면서 돈을 모았다. 엄마의 집에서 통근을 하던 터라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나가지 않았고 윤은 차곡차곡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고 윤은 서른여섯이 되던 해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