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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의 시간 Feb 04. 2024

회사를 떠나는 데 걸리는 시간, 10년


"부장님, 저 회사를 그만두려고요."

윤이 말하자 윤의 상사는 당황한 듯 물었다.

"박 과장,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회사를 그만둔다고? 이직하려는 거야? 아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요,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일하려고 해요."

윤은 찻집을 열거라는 계획을 회사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잘될 거라니 망할 거라니 어디에 열어야 한다느니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조언이랍시고 한 두 마디씩 던지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은 그냥 쉬었다 다시 일한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쉰다니... 한창 일해서 돈 벌 나이에 쉬다니... 그러다가는 결혼도 못하고 집도 못 사. 요새 아파트 값이 얼마인지 알지? 30대는 한창 돈 벌 나이라고.."

상사는 어린아이를 나무라듯이 윤에게 말하였다.

"아... 네 돈 벌어야지요..."

“대한민국은 말이야. 돈 있으면 천국이지만 돈 없으면 지옥이야. 요새 젊은 사람들 우리 회사 오려고 안달인데 그만두면 박 과장 너만 손해야. 회사 나가고 한 달만 돼 봐라. 아니 바로 다음 날 후회할 거야.”

“....”

“내가 한 달 시간줄테니까 다시 생각해 봐. 어머님이랑도 상의해 보고.. 어머님도 박 과장 네가 회사 그만둔다고 말씀드리면 기절하실 거야. 박 과장 아파트도 사고 결혼도 하고 그래야지. 우리 쌍둥이 애들 알지? 얘네 영어유치원비가 둘이 합쳐서 400이야. 400. 장난 아니지? 거기다가 특별활동이니 뭐니 해서 100이 더 들어간다니까. 요새는 입시가 유치원부터 시작이라니까. 나중에 박 과장이 아기 낳아서 영어유치원 돈 없어서 못 보내면 얼마나 애한테 미안하겠어. 진짜 내가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 봐.”

“부장님, 조언 진짜 감사합니다. 근데 저 진짜 많이 생각했어요. 돈도 벌어야지요. 근데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윤은 덤덤하게 말하였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윤도 알았다. 돈이 가진 힘을 윤도 잘 알았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가족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엄마의 끊임없는 노동 때문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늦게까지 일해서 벌어온 돈 때문이었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물려받을 것이 별로 없는 윤은 그 자신도 쉬지 않고 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혹여나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의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윤은 돈을 버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부장의 말처럼 돈이 넉넉하지 않아 아이한테 풍요로운 생활을 제공할 수 없다면 그냥 출산을 포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는 대신 자아를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1시간 같았던 상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와 시계를 보니 고작 20분의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상사가 보기에 윤은 세상을 잘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윤은 상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윤은 인수인계를 위해 11월 말까지 출근을 하기로 상사와 협의를 했고 이로서 상사와의 주요한 대화는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윤의 회사 사람들은 판박이처럼 다들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살았다. 대개는 결혼을 했고 한두 명의 아이를 두었으며 서울이나 경기도에 20평대나 30평대의 아파트가 있거나 아파트 전세를 살았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재테크나 아이 교육 이야기를 했다. 아침과 점심 때면 그들의 손에는 차 대신 커피가 있었다. 빨리 잠을 깨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연 차보다는 커피였다. 상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윤은 텀블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차분해졌고 무언가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10년이 걸렸네."

윤은 혼잣말을 했다. 어느덧 윤은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있었다. 윤은 회사 생활이 지겨웠지만 그 시간들을 버틴 덕분에 찻집을 열고 운영할 자금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입이 없어도 2년여를 살 수 있는 생활비와 혼자 살 수 있는 조그만 아파트 전셋값과 엄마에게 드릴 용돈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돈도 마련되었고 회사에 사직의사도 밝혔고 남은 일은 엄마에게 이 계획을 말하는 것이었다. 윤은 엄마에게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엄마가 화낼까 봐 두렵다기보다는 엄마가 실망할 것 같아 두려웠다. 엄마에게 윤은 말썽 한 번 없이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자랑스러운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윤은 알았다. 엄마가 실망하더라도 이제는 자기 길을 가야 할 때라는 것을 말이다.


윤이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은 마침 미용실이 쉬는 날이었다. 엄마와 저녁을 먹고 난 후, 윤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친구가 이번에 영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나 마시라면서 홍차를 선물해 준 거 있지. 이거 같이 마셔보자."

"그래, 그러자."

윤은 물을 끓이면서 찻잔을 고르느라 고심을 했다. 그리고는 대학 입학 때 엄마 친구가 사주었던 노란색 꽃무늬의 찻잔을 두 개 꺼내 들었다. 

"윤아, 너만의 색을 갖고 인생을 살면 좋겠어. 그러면 너의 인생은 반짝반짝 빛날 거야." 

엄마 친구는 대학을 입학하는 윤에게 그런 말을 남기며 찻잔을 선물했었다. 

'나만의 색을 갖고 산다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구나.'

윤은 생각했다. 윤은 지난 10여 년의 회사생활이 잿빛처럼 느껴졌다. 회사는 '이름'과 '돈'을 윤에게 주었지만 윤만의 색은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윤은 본래 자신이 어떤 색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 오늘 차가 참 좋구나."

윤의 엄마가 말하였다.

"근데 엄마, 나 할 말이 있어."

"뭔데?"

티테이블 앞에 앉아 가만히 노란 꽃 찻잔을 응시하던 엄마는 이내 말하였다.

"이 찻 잔 정말 오랜만인데. 지수가 선물했던 찻잔이지?"

"응 맞아. 기억나?"

"그럼... 지수 덕분에 내가 차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어. 지수네 찻집이 우리 미용실 근처였자나. 이상한 손님이 와서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가는 날이나 손님이 없어서 마음이 불안했던 날에는 꼭 그 저녁에 지수네 찻집에 들렸었어. 거기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을 마시면 그냥 그 순간 위로가 되더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순간 위로가 되더라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혼자서 차를 마셨던 시간들이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그나저나 너 무슨 할 말 있어?"

"음..."

윤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엄마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이내 윤에게 물었다.

"회사를 그만뒀다고?."

"응, 나 찻집을 열고 싶어. 그리고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서울 쪽에 가게를 낼 거야."

"찻집?"

엄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물었다.

"너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서.. 나도 엄마가 나 대기업 다니는 거 자랑스러워했던 거 아는데 근데 나 엄마... 거기서 행복하지가 않았어. 그래서 돈은 좀 적게 벌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조금 더 관심 가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 나도 살면서 힘들었던 순간순간에 차를 마시며 위로를 받았거든. 그래서 나도 나처럼 지친 사람들에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

엄마는 말이 없었다.

"엄마, 나 이미 다 결정했어. 그러니까 내가 잘할 수 있게 응원해 줘."

엄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응시했다. 

윤도 더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찻잔을 응시하며 가만히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말하였다. 

"음... 나는 그냥 네가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거지.. 그래서 네가 대기업에 다니는 게 좋았던 거 같아. 여자 혼자 장사한다는 게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거든. 거기다 나는 남편도 없어서 뭐랄까 이상한 손님도 많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순간들도 많았던 거 같아. 그런데 큰 회사에 속해있으면 적어도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가 대기업에 속해서 살기를 바랐던 것 같아. 근데 정작 네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할 말이 없네."

"응, 나는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어차피 너도 어른이고 네 인생이니까 나는 네가 대기업에 다니는 걸 강요할 수는 없지. 근데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혼자 사업을 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러겠지. 나도 엄마 미용실하는 거 30년을 봐왔잖아."

"그렇지. 그렇지만 뭐... 너는 내 딸이니까 내가 했던 것처럼 너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엄마는 윤이 빈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제와 결심한 윤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너 결혼은 안 할 거야?"

"우리 엄마, 또 시작이네."

엄마의 결혼 얘기에 윤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너도 네 친구들처럼 일이랑 결혼할 셈이야?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회사 잘 마무리하고 찻집 그거 한번 잘해봐. 엄마가 도와줄 거 있음 말하고."

엄마에게 말하고 나자 윤은 마음이 개운했다. 그리고 엄마의 말대로 혼자 사업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그리고 엄마가 미용실을 30년간 잘 운영해 왔던 것처럼 윤 역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윤은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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