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에도 현의 하루는 예측 가능했다.
아침으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공부를 했고 점심을 먹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저녁 7시가 되자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를 먹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언뜻 보니, 생기도 없고 의욕도 없는 어떤 여자가 앉아있었다.
'나도 반짝반짝 빛나던 날이 있었겠지?.'
현은 자신이 반짝반짝하던 때를 떠올리려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찻집에 가고 싶었다. 현은 공부를 하러 원룸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30분 남았으니 찻집에 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찻집이 보였다. 그날도 손님은 없는 듯했다. 가까이서 창문 너머를 보니 찻집 주인이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윤이 말하였다.
"어제 오셨던 분이시네요. 잘 오셨어요."
현은 누군가가 자신을 반가워한다는 게 어색했다.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떤 차를 드시겠어요?"
"글쎄요.. 흠.... 여기 오늘의 차는 뭐예요?"
"오늘의 차는 다즐링 홍차예요.”
“다즐링 홍차가 뭔가요?”
“다즐링 홍차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홍차의 1%밖에 되지 않은 귀한 차예요. 특히 오늘 드리는 차는 다즐링 홍차 중에서도 퍼스트 플러시라는 종류의 차인데요. 녹차와 꽃이 함께 있는듯한 향이 난답니다. 오늘 이 차와 함께 하시면 마음도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오늘의 차로 주세요."
현은 차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 차와 함께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는 윤의 말에 이미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책장이 있는 쪽으로 갔다. 어제 이 찻집에서 읽었던 그 책을 또 읽고 싶었다. 다행히 그 책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현은 책을 가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 앉았던 창가 쪽 자리에 말이다. 책 속 주인공은 의사에게 시간을 처방받은 후, 일을 그만두고 도시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간다. 그 집에서 그는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자연을 만나고 명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나자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진' 자신의 영혼과 조우한다.
'내 영혼은 어디 있는 걸까.'
현은 혼자 생각했다.
"차 나왔습니다.”
차와 쿠키가 나무쟁반에 담겨 나왔고 그날따라 찻잔이 더 눈에 띄었다. 흰색 바탕에 하늘색과 파란색으로 꽃이 그려진 찻잔이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찻잔에 정성스레 담겨 있는 차를 보니 현은 새삼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고 현은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쓰린 맛이 났다. 현은 책 속 남자를 보다가 문득 자신의 20대를 생각했다. 현은 재수를 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 지방에 있는 부모님이 원룸 월세를 포함해 일정한 돈을 매달 보내주시기는 했지만 서울살이를 하기에는 늘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현은 편의점 알바와 학원 알바를 병행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메꿨다. 방학 때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동기들은 유럽이나 미국에 해외여행을 가거나 어학연수를 갔다. 그러나 현은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공부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보냈다. 그래도 현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2학년 2학기가 되자 본격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했다. 현과 같은 문과생은 길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대개 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을 보았다. 간혹 창업을 하거나 전문직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거나 유학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매우 소수였다. 현은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기에 시간적 혹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투자가 필요한 직업은 현의 선택지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기업에 취직을 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만이 현의 선택지에 있었다. 어떤 길이 좋을지 고민하던 현에게 부모님은 공무원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며 현을 설득했다. 특히나 현의 엄마는 평생을 주부로 살아왔기에 현에게는 늘 직업을 가지라고 얘기해 왔었다. 또한 자신의 남편이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회사가 갑자기 파산하는 바람에 일용직을 전전하는 것을 경험했기에 현만큼은 잘릴 걱정 없이 꾸준히 다닐 수 있는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랐었다. 그랬기에 현의 부모님, 특히나 현의 엄마가 현에게 공무원이 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현은 딱히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잘릴 걱정 없이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는 공무원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의 바람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때부터 현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부분을 의존하며 살아왔다. 빨리 합격하는 것이 부모님께 보답하는 것이라 믿으며 현은 1-2년 내에 합격하겠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의 현은 4년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올해에는 꼭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현에게는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내적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현은 20대가 되고부터 쉼이라는 게 없이 계속해서 달려왔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생이 되면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니 취업 준비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고는 정말이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 공부 4년 차인 요즘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무언가에 질질 끌려가듯 사는 것 같았다.
"저... 손님. 저희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어요."
윤이 말하자 생각에 잠겨있던 현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였다.
"아, 네... 제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잘 마셨습니다."
현은 찻집을 나왔다. 그러더니 다시 들어가 물었다.
“혹시 집에서 마실 수 있는 차를 파나요?”
윤은 말했다.
“아... 아니요. 하지만 제가 집에서 드실 수 있게 좀 담아드릴게요. 손님이 제 첫 손님이시거든요.”
현은 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과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자기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윤에게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윤은 차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가더니 작은 유리병에 윤의 레시피로 만든 찻잎들을 넣었다. 그리고 찻잎을 넣을 수 있는 종이 티백 여러 장을 비닐팩에 밀봉하였다.
“일주일 정도는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말린 생강과 레몬그라스 잎으로 만든 차예요. 요즘 같이 추운 날에 딱이랍니다.”
윤은 현에게 찻잎이 담긴 작은 유리병과 종이 티백 여러 장이 담긴 비닐팩을 건넸다.
“아... 받아도 될까요?... “
“그럼요.”
망설이던 현은 윤이 건넨 유리병과 비닐팩을 받았다.
“찻잎을 작은 스푼으로 두 스푼 정도 이 종이 티백에 담으시고 3분 정도 우린 다음 드시면 되세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현은 윤에게 인사를 하고 찻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원룸으로 돌아왔다. 현은 원룸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물을 끓였다. 윤이 알려준 대로 찻집에서 받아온 찻잎을 빈 티백에 두 스푼 넣고 티백의 양쪽 끈을 당겨주었다. 그리고는 머그컵에 티백을 넣었고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부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윤은 자리에 앉아 차가 충분히 우려 나올 수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티백을 꺼냈다.
현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아 좋다.....”
차의 맛을 음미하던 현은 다시 자신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새 들어 슬럼프를 겪고 있던 현은 자신에게 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물론 누군가 현에게 쉴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스스로도 당당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이룬 게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은 쉬어서는 안 되는 걸까… 그럼 대체 언제 쉴 수 있는 걸까. 공무원이 되면 쉴 수 있을까. 공무원이 되면 분명 또 그다음 과제가 있을 것이다. 일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할 것이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할 것이고 육아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은퇴를 해야 쉴 수 있는 건가. 대한민국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정답이 정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 같았다. 하나의 과제를 끝내면 그다음의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는 그 과정에서 쉼표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쉼표를 찍지 않으면 인생에 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은 이룬 것이 없어도 지금 이 시점에 스스로 쉼표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춤의 시간을 통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왜 공무원이 되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하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은 공시생이 되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비상용으로 300만 원 정도를 저축해 두었었다.
‘한 달만 쉬어보자. 쉬면서 나만의 답을 찾아보자.’
그렇게 현은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쉼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침 7시가 되니 현은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현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1회용 아메리카노 포장을 뜯으며 커피를 마실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려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냉장고에는 2L짜리 생수 2병과 말라버린 사과 두 개, 그리고 엄마가 고향에서 보내준 김치통이 덩그러니 있었다. 비어있는 냉장고가 자신의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방금 포장지를 뜯은 커피를 머그잔에 넣으려다 문득 어제 찻집에서 받은 차가 떠올랐다. 현은 커피 대신 차를 마셔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오늘부터 한 달은 자신에게 쉼의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잠에서 깨어 공부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싶었다. 그래서 커피 대신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사 온 빵도 함께 말이다. 현은 차와 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평소 현은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웠기 때문에 대개 아침을 먹는 시간은 5분 길면 10분이면 끝이 났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침 시간을 음미할 수 있었다. 현이 마신 그 차는 생강의 알싸한 맛과 레몬그라스의 풀잎 향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평온함을 주었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사 온 빵의 고소한 향도 좋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현은 조금 남아있는 차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앞으로 한 달간 어떻게 쉴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3년을 지속해 온 수험생활을 잠시 중단하니 불안한 마음도 불쑥불쑥 들었지만 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대학 진학 전이나 취업 전 등의 시기에 1년의 휴식기를 갖고 향후 나갈 방향을 고민하는데 이 기간을 갭이어(gap year)라고 부른다고 한다. 현은 자신의 상황상 1년을 쉬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1개월을 쉬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갭먼스(gap month)로 부르기로 했다. 현은 핸드폰 메모장 앱에 적기 시작했다.
‘한 달의 gap month동안 하고 싶은 일
1. 아무 생각 없이 쉬기
2. 청소
3. 차 마시기
4. 공무원 시험 준비 계속할지 말지 결정하기
5....
적고 나니 무언가 대단한 게 없었다. 5번을 이어 적고 싶었지만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일단 이 네 가지를 포스트잇에 옮겨적고 벽에 붙여두었다. 그리고는 장을 보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동안 먹는 것에는 돈과 시간을 아꼈던 현이었다. 그래서 주로 현은 편의점이나 분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아니 끼니를 때웠다. 집에서 요리를 해서 먹은 지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드는 요리는 현에게 사치였다.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한 달 동안 현은 자신에게 쓸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현은 장을 보며 배추, 당근, 양파, 대파, 돼지고기, 두부, 사과 등을 샀다. 5만 원 남짓의 돈이 필요했지만 비상금 덕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점심을 먹기 위한 요리를 할 채비를 하였다.
‘뭐 먹지?’
현은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 문을 열고 엄마가 보내준 김치를 꺼냈다.
물을 끓이고 김치와 손질한 돼지고기를 넣고 한 시간을 끓였다. 그리고는 두부와 파를 넣고 10분여를 더 끓였다. 현은 즉석밥과 자신이 만든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없었으므로 천천히 식사를 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현은 오늘도 찻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나갈 채비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현이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윤이 말했다.
“네, 오늘 햇살이 참 좋네요.”
현은 창가 쪽에 자리 잡았다. 오늘도 역시나 손님은 현 한 명뿐이었다.
“어제 주셨던 차 정말 잘 마시고 있어요. 감사해요.”
”잘 마시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
”음... 오늘은 녹차를 마시고 싶어요. 녹차 있나요? “
“그럼요. 하동에서 온 녹차예요. 잠깐 앉아계시면 준비해 드릴게요.”
현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추워서였는지 사람들의 발길이 빠르게 느껴졌다. 현은 몇 년 만에 느끼는 이 여유가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윤이 녹차를 건네러 현의 자리로 왔다. 녹차를 현의 자리에 놓으며 윤이 말했다.
“평안한 시간 되세요.”
현이 녹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었다. 찻잔의 따뜻한 기운이 현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녹차를 한 모금 마시니 녹차의 씁쓸하면서 고요한 맛이 느껴졌다. 현은 이 찻집이 참 좋았다. 이 공간에 오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현은 책장으로 가 다시 또 그 책을 꺼내 들었다. 현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이 어떻게 이렇게 한 달이나 쉴 수 있는 결정을 내렸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과 이 찻집이 나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게 아닐까... 내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고 알려준 것 같아. 아마 충실하게 이 기간을 쉬다 보면 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계속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지, 나아가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현은 엄마에게 남들 하는 만큼 하고 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다 때가 있는 거야. 남들 공부할 때 너도 하고, 남들 결혼할 때 너도 결혼하고 그렇게 사는 게 제일 좋은 삶이야.”
현은 엄마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이제까지 삶을 살아왔다.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돈을 좀 모으고 그러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삶. 그 삶이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남들에 맞춰진 삶 속에 자기 자신은 없었다. 현은 그동안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져야 즐겁게 일할 수 있는지, 혼자 사는 것이 더 맞는지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 더 맞는지,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 없이 그저 남들이 혹은 사회가 좋다고 하는 것들을 그저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은 그렇게 차를 마시고 사색하며 평일 오후를 보냈다.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자 현은 배가 고파졌다. 집에 가서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하는 마음에 나갈 채비를 하였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현은 윤에게 인사했다.
“네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뵈어요. “
다음날에도 현은 찻집을 찾았다. 현은 찻집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사색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날은 처음으로 현 이외에 다른 손님이 또 있었다. 현은 자신만의 아지트가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도 이 찻집에 와서 위로를 받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현은 생강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응시했다. 현은 대낮에 공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하는 자기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참 달려야 할 때에 멈춘 자신을 보며 불안하기도 했다. 이미 공무원이 되어 심지어 결혼까지 한 친구를 떠올리니 자기는 한참 뒤처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은 수그러들었다.
‘다 각자의 인생이고 각자의 때가 있는 거지. 일단은 이 한 달을 온전하게 보내보자. 내 마음 가는 대로.’
그러던 차에 윤이 현에게 말을 건넸다.
“저... 손님. 혹시 괜찮으시면 이 음식을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아,, 혹시 파이인가요? “
“네 애플파이예요. 제가 하이티(high tea) 세트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하이티가 뭔가요?”
“네, 영국의 노동자 계층을 위한 티타임이에요. 1800년대에 영국 귀족들은 대낮에 애프터눈티를 즐겼지만 노동자들은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파이나 치즈를 곁들인 티타임을 가졌는데 그걸 하이티라고 해요. 저도 저희 가게 오시는 손님들이 하루 일과 마치고 오셔서 따뜻한 티와 음식으로 위로받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하이티 세트를 준비하고 있지요. “
“아, 그렇군요..”
현은 윤이 가지고 온 파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금 만든 파이라 사과의 달콤한 향과 고소한 버터향이 현을 설레게 하였다. 현은 이내 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고소하고 부드러워요. “
“다행이네요. 밀크티랑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
“네 그런데 제가 우유를 못 마셔서...”
“아 그러면 두유는 괜찮으세요?”
“네 두유는 괜찮아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 윤은 현에게 나무쟁반에 담은 두유 밀크티를 가져다주었다. 현은 두유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또 마셨다. 차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은 가만히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뭘 할까... 집 정리나 해야겠다. 정리하면 내 마음도 정신도 좀 정돈되지 않을까?‘
현은 찻집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뭐부터 정리할까 생각하다가 현은 우선 공부할 때 가지고 다니는 가방을 정리해야겠다 싶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열어보니 가방 속이 엉망이었다. 영수증 약 스무 장, 썼던 휴지와 물티슈, 핸드크림, 빨대, 책 네 권, 연습장, 펜 다섯 자루와 체크카드 두 장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엉망인 가방 속이 꼭 현의 마음속 같았다. 현에게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뒤엉켜있었다. 영수증들을 펼쳐보니 대부분 편의점과 분식점에서 쓴 돈들이었다.
현은 씁쓸해하며 영수증들을 모아 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가방 속 잡동사니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방은 금방 정리가 되었다. 쓰레기들을 버리고 나니 마음도 후련했다. 그리고는 책 정리를 시작했다. 공무원 시험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다. 공부를 계속할지 말지 결정을 못했기에 현은 그 책들을 그대로 두었다. 대신 지난 1년간 손도 대지 않았던 책들을 골라 중고 책방에 팔기로 하였다. 그 책들은 대개 처세술이나 재테크 등에 관한 책이었다. 현이 가지고 있던 책들의 1/4이 그렇게 현의 책장에서 나왔다. 현은 그 책들을 종이상자에 담았다. 더 이상 현에게 의미가 없는 책들을 버리기로 하니 현은 또다시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리 덕택에 마음이 개운해진 현은 가만히 책상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갔던 찻집 주인이 떠올렸다.
‘그 사람, 자기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다고 자기를 착취하면서 죽어라 일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자기 일상을 건강하게 지키면서 일도 즐겁게 하는 것 같단 말이야.’
현은 그런 윤이 부러웠다. 자신에게 어떤 직업이 어울릴지 충분히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엄마가 안정적이라고 한 직업을 가지려고 3년이라는 시간을 써버렸으니까 말이다. 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직업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쫓기면서 앞에 있는 일들을 쳐내면서 살아온 것 같았다.
‘나 뭐 좋아하지?’
현은 적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1. 산책
2. 바나나우유
3. 빵
‘
적고 나니 현은 더 막막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직업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3여 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힘을 쏟았던 현은 취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집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 현이 눈을 뜨니 아직 아침 7시였다. 여느 때였다면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을 터였다.
현은 운동복에 파카를 입고 집을 나섰다. 아침 산책을 하고 싶었다.
5분여를 걷자 공원이 나왔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하였다.
현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답답함과 불안함들이 숨을 내쉴 때 같이 사라지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찻집 주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이에요. 운동하시나 봐요.”
“네, 걷기 운동하러 왔어요. 자주 나오시나요?”
“일주일에 2-3번 정도 나와요.”
“그렇군요. 저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네, 아침에 걷기 운동을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정리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현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찻집 주인인 윤을 만나 기분이 좋았다.
현은 마음이 단단해 보이는 윤을 보면서 자신도 역시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일단 집에 가서 아침을 잘 챙겨 먹어야겠어. 오늘 메뉴는 된장찌개에 계란프라이, 밥이야.
운동 끝나고 마트에 들러 된장을 사가야지.’
현은 자신의 이런 고민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저번주까지만 하더라도 무언가를 요리해서 먹는다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으니까… 게다가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 역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하루는 공부 공부 공부였으니까.
집에 돌아온 현은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려서 먹고는 원룸을 청소했다. 그리고는 다시 찻집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윤이 반갑게 현을 맞아주었다. 오늘도 손님은 현 뿐이었다.
“네, 저는 현이라고 해요.”
“아 네 저는 윤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공원에서 봬서 반가웠어요.”
“네 저도요. 생강차 한 잔 주세요.”
“네 자리에 앉아계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현은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현은 여느 때처럼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공원을 바라보았다.
‘공무원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걸까. 나 사실 그 직업에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 그냥 안정적으로 살려고 그러는 거자나.’
현은 혼자 생각했다.
“생강차 나왔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혹시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 아니요. 그냥…”
“네, 평안한 시간 되세요.”
현은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혼자 적기 시작했다.
‘공무원의 장점과 단점..
장점: 안정적인 소득, 괜찮은 사회적 인식, 나중에 육아할 때도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음
단점: 내가 열정을 못 느낌’
현은 자신이 적은 것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깊은 고민 없이 그저 엄마가 원하니까 이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엄마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근데 내 나이가 벌써 스물일곱인데.. 친구들은 벌써 사회에 나가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데 나만 이게 뭐지.. 너무 뒤처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 3년이나 공부했으니 조금만 하면 붙지 않을까. 어차피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는 사람 얼마나 된다고.. 다들 그냥 먹고살려고 일하는 건데 뭐.. 내가 집에 돈을 쌓아둔 것도 아니고 그냥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사는 게 최선이 아닐까..’
현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현의 마음은 공무원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생각했을 때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생강차를 한 입 마셨다. 따뜻하면서도 아린 생강차의 맛이 좋았다.
“차 어떠세요?”
윤이 물었다.
“네 따뜻해서 좋아요. 저..”
“네..”
“혹시 지금 하는 일 좋아하세요?”
“네?..”
“아 그냥 궁금해서요.”
“음…”
윤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는 이 찻집을 시작한 지 아직 한 달이 안되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는 걸 생각할 때 마음이 설레요. 그리고 음.. 이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러면 찻집 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저는 원래 회사원이었어요. 해외영업팀에서 일을 했었는데 음 그때는 사실 제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그런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무언가 마음이 충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두 번째 직업은 경제적으로는 안정성이 좀 떨어져도 제 마음이 충만해지는 일을 찾아보려고 했었고 결국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네.. 그렇군요. 제가 요새 직업 고민을 하고 있어서요.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현 님한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얘기해 드릴 수 있어요. 평안한 시간 되세요.”
“네 고맙습니다.”
현은 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현은 그 후로도 두 시간여를 찻집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고 현은 얼마 전 갔던 빵집에 들러 식빵을 샀다.
그 식빵은 유기농 밀가루로 만들어 가격은 다소 비쌌지만 매일 그날 만든 빵만 팔아서 빵이 폭신폭신 맛있었다. 빵을 산 현은 집에 가서 마요네즈와 계란, 감자, 양배추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었다.
“음.. 맛있어.”
현은 이렇게 무언가를 요리해서 먹는 게 즐거웠다. 비록 시간이 많이 들고 노력도 많이 들었지만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현은 차를 마시고 청소를 하고 걷기를 하고 요리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상이 하라는 생산적인 무언가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은 자신의 뿌리를 단단하게 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자신의 삶을 단정하게 가꾸는 시간들 말이다.
다음 날도 현은 찻집에 갔다. 현은 찻집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물론 현은 찻집에 있지 않더라도 대개는 항상 혼자였다. 2년간의 노량진 생활동안은 같이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동기들이 있었고 또 학원이나 스터디그룹에서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약 1년 전 노량진 고시원에서 지금의 이 동네 원룸으로 이사 온 이후로는 혼자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오직 합격만 생각하고 달려왔던 지난 시간 속에 현이라는 사람은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찻집에서의 혼자만의 시간은 자신을 돌보고 사랑해 주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오늘 현은 찻집에서 아침을 먹고 싶어 하이티 세트를 주문했다.
애플파이와 홍차가 정갈한 쟁반에 담겨 함께 준비되어 나왔다.
“오늘 즐거운 일 있으세요?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윤이 물었다.
“아, 아니요.. 제가 사실 공시생인데 요 며칠 공부를 쉬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윤에게 말하였다.
“그러시군요.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아니에요. 혹시 갭이어(gap year)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네 들어봤어요. 혹시 갭이어 중이신 거예요?”
“아 갭이어까지는 할 상황이 아니어서 저는 갭먼스를 보내고 있어요. 한 달만 좀 쉬어가려고요. 오늘이 사일째예요.”
“오 그러셨군요. 갭먼스라니 그래도 그런 결정하시기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대단하세요.”
“아니에요. 마침 공무원 시험 준비하기 전에 아르바이트해서 모아놓은 돈이 좀 있어서 그걸로 생활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대화를 나누던 중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은 양해를 구하고 주문을 받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현은 혼자서 바깥 공원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렇게 잠시 멈추어 가는 시간이 참 좋네.’
어느덧 갭먼스를 보낸 지 2주가 지났다. 반 정도를 보내었고 이제 반 정도의 시간이 현에게 남아있었다.
현은 오늘도 습관처럼 찻집에 들렸다. 홍차를 마시며 현은 또 생각에 잠겼다.
‘갭먼스를 지내면서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현은 이제 자신을 돌보는데 시간을 쓰고 있었다. 티타임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보는 시간을 갖고, 편의점이나 분식점에서 식사를 때우는 대신 적어도 하루 한 끼는 자신을 위해 직접 음식을 해 먹고 있었다. 게다가 생전 하지 않았던 아침 산책도 종종 했다. 그런 시간들 덕에 현은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핸드폰 메모장 앱을 열어 갭먼스를 시작할 때 썼던 메모를 읽어보았다.
‘한 달의 gap month동안 하고 싶은 일
1. 아무 생각 없이 쉬기
2. 청소
3. 차 마시기
4. 공무원 시험 준비 계속할지 말지 결정하기
5....'
아무 생각 없이 쉬기와 청소, 차 마시기는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공무원 시험준비를 계속할지 말지 결정을 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사실 공무원 시험은 그만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현은 시험준비를 그만둔다면 무엇을 할지를 몰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누군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 부러웠지만 현은 그것을 찾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외치는 한국사회에 화가 났다. 10대 내네를 대학 가는데 온 에너지를 쏟게 하고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탐색해 볼 기회도 주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대학 졸업할 때가 되니 좋아하는 일을 하라니 말이다. 게다가 설령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현같이 경제적으로 든든한 부모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현은 혼란스러웠다. 이미 20대의 3년여의 시간을 공무원 공부에 투자했으니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현은 아직 자신에게 2주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계속해서 고민을 해보기로 하였다.
나머지 2주 시간 동안 현은 차를 마시고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 이제 갭먼스의 끄트머리에 와있었다. 현은 이룬 게 없지만 인생 첫 쉼의 시간을 갖도록 용기를 낸 자신을 격려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갭먼스 동안 종종 갔던 빵집에서 조그마한 고구마케이크를 사 왔다. 집에 와 혼자 불을 켰다. 고구마케이크와 녹차로 갭먼스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현은 한 달의 갭먼스를 통해 자신이 영혼을 찾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직 영혼을 완전히 찾고 조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한 달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사회에 제 기능을 하는 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이 보였다. 윤은 생각했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 최선인지 말이다. 윤은 올해까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렇게 했다. 비록 자신이 이 일을 좋아하거나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나 적성 등을 생각했을 때 공무원 공부를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올해에도 떨어진다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시험 합격에 매몰되어 자기를 소홀히 대하지는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자신의 형편이 허락하는 한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시간과 차를 마시는 시간은 가져야겠다 싶었다.
다음날 아침 현은 된장찌개와 밥을 준비해 아침을 차려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한 달 전처럼 다시 공부하는 현이 되었지만 현의 마음만은 달랐다. 그날 저녁 저녁을 챙겨 먹고 찻집에 들렀다.
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현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또 왔어요.”
“어서 오세요. 벌써 입춘이네요. 시간이 정말 빨라요.”
“그러니까요. 저 아쉽게도 갭먼스가 끝이 났어요.”
“그렇군요. 그동안 어떠셨어요?”
“음 저를 좀 돌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죠. 자기를 돌보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요.”
“네, 공시 준비하면서 저는 저를 버리고 목표 달성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사실을 이번에 한 달을 멈춰보고 나서 깨닫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현님 처음 저희 찻집에 오셨을 때가 떠올라요. 그때 정말 지쳐 보이셨어요.”
“리틀 티타임과 윤님 덕분에 쉬어갈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실제로 잘 쉬었고요. 이제는 저 자신과의 티타임을 자주 가져보려고요.”
“그렇게 느끼셨다니 제가 너무 감사하네요. 앞으로도 현 님을 응원할게요.”
현은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