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 지추(地中)미술관

지하에 지은 빛의 신전

by 문현

이 미술관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지중’미술관, 일본식으로 읽으면 ‘치추’미술관이 적절할 텐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은 또 ‘지추’미술관이다. 이름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호명/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믿으면서도 일단은 한국 여행객들에게 익숙할 ‘지추’미술관으로 타협하기로 한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미 이름에 드러난다. 땅(地) 가운데(中) 있는 미술관. 외벽이 지면 위로 올라가는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다르게 지추미술관은 지하로만 세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말랑한 갯벌에 레고 조각들을 꾹 눌러 넣은 형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사진 출처: 베네세 아트 사이트 홈페이지 https://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미술관 건물이 섬의 자연풍광을 해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는데, 가끔 혹은 자주 이 결정이 친환경적 의도로 오해 받는 듯하다. 건물이 땅 아래로 깊게 묻히는 것이 지면 위로 올라가는 일반적인 방법보다 친환경적일 수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의아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서 혼자 속으로만 궁금해하다가 차현호 건축가가 쓴 <나오시마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서 같은 의구심을 발견했다.


애초에 오염된 나오시마를 예술의 힘으로 복원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프로젝트의 심장과도 같은 미술관이니 어련히 알아서 환경에 가해지는 피해를 최소화했겠나 믿지만, 친환경이라는 꼬리표가 제자리가 아닌 곳에 붙는 것은 거북하다. 굳이 어떤 이름표를 붙이자면, ‘아름다움 지상주의’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서론이 길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자.


예약 시간에 맞춰 미술관 입구에 도착하면, 도착 시간에 따라 잠시 대기하게 된다. 시간이 되면 표를 검사하면서 안내사항을 짧게 전달하는데 주로 미술관 내부는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는 내용이다. 입구에서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짧고 예쁜 길이 끝나면, 이제부터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

카메라 그림이 있는 구역을 제외하고는 촬영 불가. 헷갈리게 저 약간의 구역은 왜 또 촬영 가능인지 의아하겠지만 벽을 타고 올라가는 덩굴 등이 볼만하니 사진으로 남겨도 좋겠다.

하지만 카페에서 외부 테라스로 나갔을 때는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촬영 불가 구역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짐 보관함에는 가방과 무거운 겉옷만 넣자. 보관함이 구석에 숨어있어 못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규모가 크거나 소장품 수가 많지 않은 미술관인데도 이 미술관에서는 꽤나 걷게 된다. 카페와 기념품숍에서 사용할 현금과 핸드폰만 남기고 전부 보관함에 넣고 가볍게 움직이자.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곳이므로 시작 지점에 있는 기념품샵은 나올 때 들르면 된다. 기념품샵을 씩씩하게 통과하여 목적지로 향한다.


이런저런 미술관들을 방문해 보면 미술관은 대체로 예술가의 생가이거나, 작업실이거나, 콜렉터의 전시장이거나, 예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미술관’ 중 하나인 듯하다. 그중 드물게 이곳은 ‘신전’이구나, 싶은 미술관이 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지추미술관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피카소라는 한 예술가에게 바쳐진 신전 같았던 피카소 미술관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지추미술관은 세 명의 예술가를 위한 신전이기도 하고, 동시에 '빛'을 모신 '빛의 신전' 같기도 하다.


지하에 세운 '빛의 신전'이 말이 되나 싶겠지만, 지추미술관을 서성이다 보면 자주 지하임을 잊게 된다.


오직 세 명의 예술가들의 작품만 전시된 땅 속의 미술관.

예술가 세 명의 작품 모두 합쳐봐야 고작 아홉 작품(미술관 자체를 안도 타다오의 예술 작품으로 세더라도 열 작품)밖에 없는 미술관.

미술관 지도에는 ‘추천 루트는 없습니다. 원하는 순서로 자유롭게 보십시오.’라고 안내되어 있다. 그 말대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어디든 모처럼 한적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시실로 들어가면 된다.


<월터 드 마리아- Time/Timeless/No Time>


월터 드 마리아의 <Time/Timeless/No Time>은 안도 타다오의 특징적인 노출 콘크리트가 작품 전시를 위한 벽면 이상의 역할을 한다. 커다란 전시실을 둘러싼 벽면 자체가 작품의 일부로 느껴진다.

(작품명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게 마땅하지만, 이런 언어유희로 이루어진 작품명은 번역이 불가능하다. time-시간/ timeless-시간 개념이 의미'없는' 영원한/no time-시간 '없음'. 단어 네 개로 이루어진 멋진 작품명을 저렇게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고 '시간/영원/시간 없음'이라는 일반적인 번역만 소개하자니 불충분하다.)

출처: 예술의 섬 나오시마/마로니에북스
사진 출처: 베네세 아트 사이트 홈페이지 https://benesse-artsite.jp/en/art/chichu.html

콘크리트 벽면에는 금박을 입힌 나무 기둥이 띄엄띄엄 놓여 있고 계단 한가운데 커다랗고 완벽하게 둥근 화강암이 존재감을 자랑한다. 계단 위쪽에서 두툼한 로브를 뒤집어쓴 비밀 조직의 일원이 무언가(누군가의 잘린 목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보석 같은 것이 어울리겠다)를 올린 은쟁반을 들고 엄숙하고 장엄하게 계단을 한 칸 한 칸 느린 속도로 걸어 내려올 것만 같다. (네, 판타지 장르 무척 좋아합니다)


자연광이 거대한 공간을 아낌없이 채우고 있어서, 다시 한번 지하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속도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한발 한발 조심스레 계단을 오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의 이름에 시간(time)이 계속 반복되었지, 천천히는 결국 시간을 대하는 자세 중 하나지, 따위의 맥락 없는 생각을 하며...

정확히 뭘 그려내고자 한 건지 알쏭달쏭한 작품 안에서, 그러나 이 공간의 '시간'과 걸음이 오래도록 기억되리라는 예감과 함께, 느릿느릿 시간을 흘려 보냈다.


(제임스 터렐과 모네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