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 지은 빛의 신전 두 번째 이야기
<제임스 터렐- Afrum, Pale Blue(1968) / Open Field(2000) / Open Sky(2004)>
다른 미술 작품을 대할 때와는 달리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아무 사전 정보나 지식 없이 만나는 것이 좋다.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는 영화를 보기 전에 그 반전의 정체를 알게 되면 결코 반전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터렐의 작품도 많이 공부할수록 비밀스러운 자태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순간의 경이가 사그라든다. 훌륭한 영화가 반전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봐도 좋듯이 터렐 작품도 만날 때마다 새삼스럽게 좋긴 하지만, <식스 센스>를 보기 전에 굳이 반전을 검색해 볼 필요도 없는 법이다.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되 신발을 벗고 만나야 하는 작품이 있으니 신고 벗기 쉬운 신발만 챙기자.
에이프럼 페일 블루(Afrum, Pale Blue)
지추미술관에 있는 터렐의 작품 셋 중 에이프럼 페일 블루(Afrum, Pale Blue)를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터렐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목 구석에서 에이프럼 페일 블루가 이름처럼 시퍼렇게 빛나고 있다.
에이프럼이 무슨 뜻인가 찾아보았더니 터렐이 만든 단어라고 한다. 감상자가 작품을 앞에 두고 어떠한 선입견도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특정한 의미가 없는 낯선 단어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창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작품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 가서들 보시길.
오픈 필드(Open Field)
오픈 필드(Open Field)는 한 번에 정해진 수의 관람객만 들여보내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 식겁하여 다른 작품을 먼저 보고 돌아왔더니 줄이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역시,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 작품 역시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거의 유사한 작품이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의 제임스 터렐관에 있다. 제목은 각각 오픈 필드와 간츠펠트(Ganzfeld)로 다르지만, 쌍둥이처럼 닮은 작품들이니 궁금한 사람들은 비행기도 배도 탈 필요 없는 뮤지엄산을 먼저 찾는 것도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도슨트 설명이 적절하게 동반된 뮤지엄산 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https://blog.naver.com/anothervangogh/223331700428
AVG(Another Van Gogh)라는 미술애호가들이 모여 만든 블로그에 뮤지엄산 관람기를 쓴 적이 있어서 링크를 건다. 운영자님이 ‘유유한 미술산책’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을 붙여 주셨는데, 그가 의도한 뜻이 ‘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다’(悠悠)인지 ‘깊고 그윽하다’(幽幽)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나오시마와 무척 잘 어울리는 단어다.))
오픈 스카이(Open Sky)
오픈 스카이(Open Sky) 이야기는 좀 해도 될 듯하다.
천장을 네모로 뚫어 놓고 그 아래에 둘러앉아 하늘의 변화를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뮤지엄 산에 스카이 스페이스(Sky Space)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작품이 있는데, 뮤지엄산의 하늘은 지추와는 다르게 사각형이 아니라 동그랗게 잘려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에 액자를 걸어 단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얼마나 오래 바라보든, 얼마나 여러 번 찾아오든 간에, 결코 같은 하늘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나오시마에서 숙박을 하는 사람들은 잊지 말고 지추미술관의 나이트 프로그램을 예약하자. 뮤지엄산의 컬러풀 나이트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해 질 녘 오픈스카이를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베네세에서 묵게 된 날이 토요일이길래 신나서 꼭 예약해야지 마음먹었으나 꾸물대다 예약이 다 차버려 절망했던 기억이 있다. 거 사람들 지나치게 부지런하네, 와 날래 날래 예약 않고 뭘 했냐, 사이를 오가며 원망이 안팎으로 휘몰아쳐도 뭐 어쩌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모네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