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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st Writer Jun 02. 2022

여름의 새벽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간과 정말 아주 쉽게 구분이 된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면 안다. 시원한 듯 때론 차가운 듯, 이슬이 기화되며 알게 모를 텁텁한 냉기가 코끝에 맴돈다. 고요한 사방에 풀들에게 기지개를 켜라고, 이른 햇살이 재촉한다.






여름의 새벽을 느끼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가평과 대성리. 대학생 그리고 대학원생 때 엠티나 워크샵을 가면, 평소에 그렇게 늦잠을 자던 내가 아침의 푸르름에 저절로 눈이 떠지고 혼자 산책을 하곤 했다. 저기, 방에는 다들 술에 취해 숙취에 취해 널브러져 있다.


마치 응답하라 1994의 나정이처럼, 다소 따사로운 햇살과 초록빛 나뭇잎으로 뒤덮인 산세를 천천히 보며 걷는다. 동내 개들, 고양이들, 새들과 한 번씩 눈 맞춤을 한다. 계곡 물길도 한번 밟아보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오면 아직도 다들 자고 있다. 하나 둘 잠을 깨라고 라면 끓이는 냄새를 풍기면 그제서야 일어난다. 서울을 떠나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시 서울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친구들과의 여행도 가평을 참 많이 갔다. 늦은 밤까지 고기를 구우며 온갖 실없는 이야기, 헛소리를 풍기며 감상에 빠져 들었던 밤. 다시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면 어제의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른 청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졸졸 개울물 옆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차창을 열어 내년에 만날 풀내음을 간직하려 애쓴다. 


맞다. 그 냄새는 14년 전, 군대 제대를 했던 유월의 아침에 맡았던 그 솔향기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초여름, 비 그친 새벽을 보면 제주도가 떠오른다. 폭우가 내린 여행지에서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빗소리 들으며 잠을 청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나는 다시 혼자 산책을 나가곤 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졌고 풀벌레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여행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그런 날. 심은하 배우가 유리창을 깨는 장면을 도대체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다.


여름의 새벽은 지금 이 시기의 대학 축제를 생각하게 한다. 술인지 밤비인지 무엇에 취한 건지 알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지난 다음날, 과제 조모임을 하려고 다시 아침부터 학교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든 게 사방이 고요했다. 열심히 바닥을 닦고 긁고 정리하는 청소원들의 고단함이 전해지는 새벽.


언젠가부터 북적북적하고 취한 여름밤이 싫어졌다. 그 새벽의 청소원들을 본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취기에 어지럽고 싶지 않아서 일까. 오히려 적막하고 고요한 여름의 새벽, 그 향기가 좋아졌다. 산책을 다녀와서 다시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는 게 좋다. 다시 눈을 뜨면 곧바로 간소한 점심을 먹는 그런 평범한 날.




요즘은 친구들도 대부분 낮에 만난다. 해질녘까지 기다리기엔 낮이 너무 아까운 계절. 하루의 4분의 3에 다다른 시간을 가장 기다려왔던 이십대의 내가 가끔씩은 낯설어진다.


여름의 새벽을 어떻게 기억에 담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문장보다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 가장 진부하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지금 느끼는 이 심상을 담을 수 있는 말.



'여름이었다' 그리고 '여름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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