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장만하는 이유
2022년 현재. 대한민국 30대의 혼인율은 약 절반이다. 그러니깐 길가던 30대 사람이 있다면 둘 중 한 명은 미혼 (또는 이혼) 상태인 것.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먹고 살기 너무 힘들다는 것.
응? 70-80년대 군사정권 시대에는 다들 스무 살에 결혼해서 반지하 단칸방에서 애 다섯 낳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지금 이렇게 훌륭한 사회 인프라에 스마트폰 중심의 디지털 4차 혁명시대에 뭐가 힘들다는 거야?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70-80년대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는 것. 모두가 같이 힘들면 힘든 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유튜브와 SNS 보면 나만 빼고 모두 잘났다. 누구는 해외여행 너무 자주 가서 지겹다고, 명품도 자꾸 보니 질린다고, 올해는 차 바꿔볼까? 신혼집 강남이 좋을까요 잠실이 좋을까요? 이러고 있는데 나만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하라고?
세상 모든 일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어떤 절대적 기준치를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과 비교하여 나의 상황을 추론한다. 예를 들어, 나 빼고 전부다 연봉 1억인데 나만 4천이면 나는 가난한 거고, 나 빼고 전부다 연봉 2천인데 나만 4천이면 나는 부자인 것이다. 결국 현재의 '가난'의 이유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것.
청년들이 부동산 투기에 빠지고, 깡통전세니, 영끌 시한폭탄이니, 빚투니, 벼락거지니, 코인이니, 카푸어니 이런 것들로 고통받는 이유도 결국은 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너 빼고 전부 다 잘났는데, 너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아직도 투자 안 하고 뭐하니? 너 바보니? 이런 신문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그렇게 등 떠밀린 청춘들은 또다시 빚의 늪에 빠지고, 조롱당하고, 양극화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월급 모아 아파트 사는 것은 이번 생엔 글렀어.
요즘 30대들이 결혼을 못하는 건 물론 본인들이 돈이 없어서지만, 최근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해서 남자의 '집안' 에 돈이 없어서라고도 한다. 하긴, 결혼이란 게 엄밀히 말하면 신랑 신부가 주인공은 아니다. 애초에 양가 집안의 세력과 재력을 과시하는 장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축의금 뿌린 만큼 거둬들여야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해오고, 여자가 혼수를 해오는 우리나라의 고유 전통이 아직도 굳건한데,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이 10억이다. 대출을 적당히 받아도 5~6억은 있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나라 30대 남자 중에서 통장에 당장 5억 이상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주담대 7% 를 버틸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결국엔 남자의 '집안' 이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래서 요즘은 아들을 낳으면 아들 가진 죄인이라고들 한다. 집을 해줘야 하니깐. 딸 낳으면 얼마나 좋아? 가구랑 식기랑 한복 정도만 해주면 되는데. 그 옛날 남아선호사상이 30년 만에 무너지는 상전벽해의 현장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있다. 그래, 옛날에 남여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살았던 어머니, 할머니들은 남자가 집을 해오는 것을 어찌 보면 당연히 여길 수도 있다. 남자는 가부장적이어야 하고, 여자는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며 절대복종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불평하면 안 되고, 모진 시집살이는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배워왔고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집은 남자가 해오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그러면 남자가 가부장적이어야 하나? 그건 또 아니다. 결혼할 남자는 스윗하고 자상해야 한다. 시대가 변했잖아. 그렇다면 왜 이런 아이러니와 괴리가 생겼을까?
사실, 지금의 30대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즉 20세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낭만(?)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얻어맞는 건 너무 당연했고, 가정폭력은 뉴스거리도 아니었던 시절이다. 러시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호인들의 야인시대였던 것.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필자가 대학생일 때 교수님이 강의시간에 옛날 빵집? 미팅 얘기를 해준 적이 있는데, 아마 교수님은 80년대 학번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데이트할 때 여자는 한 푼도 안 냈다고. 어딜 여자가 감히 계산을 해? 이런 시대였다. 남여차별과 인권이 엉망이었던 만큼 너그럽고 혜택도 있던 시대라고 하면 될까.
그런데 데이트 통장이 보편화된 요즘은 저런 말 하면 꼰대니, 라떼니 큰일 난다. 벌써 몇 년째 교육 쪽 인사는 모조리 진보 성향으로 채워지고 있는 바야흐로 21세기 '인권'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건, 자유, 평등, 존중, 개성, 자아실현 등등이니깐. 차별은 나쁜 것이고 불합리와 불평등이 있으면 안 된다. 사실 너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들이 모두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 변화의 속도는 하나하나 정말 제각각이다. 물론 아주 먼 미래에는 맞춰질 수 있겠지만, 아직 당장은 그렇지 못하다.
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해오는 것은 어찌 보면 여자의 입장에서는 혜택이다. 사회적으로 인권과 평등이 맞춰지는 만큼 기울어진 혜택들 역시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아가야 하는데..... 막상 그러려니 좀 아쉽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없었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줬다 뺏으면 또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심리가 있다. 꼭 남여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그렇다. 국민연금 100만 원씩 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50만 원씩 준다? 분노가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
만약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남여 모두 의무 병역 복무를 시작했었으면, 지금의 남여 군대 갈등이 없었을 수도 있다. 남여가 원래부터 다 같이 군대를 가는 건 당연했으니깐. 오히려 남자만 가는 것을 더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병역자원이 넘치던 그 시절이라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만약에 어느 시점부터 병역 자원이 모자라서, 남여 모두 의무 복무를 시작해야 한다면, 여자 입장에서는 원래 혜택이 있다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 같아도 화나지. 장난하니? 왜 나부터 시작인 건데? 이런 말이 나올게 뻔하다.
20세기가 낭만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대격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양극화에, 젠더갈등에, 부동산 문제에, 전염병에, 기후변화에, 전쟁에, 교과서에서만 보던 스태그플레이션 까지 있다. 다음 메뉴는 뭘까? 이쯤 되면 이런 게 궁금해진다.
다만, 언젠가는 변화의 속도가 모두 맞춰지고, 최적점으로 모든 것이 수렴하게 될 날이 오게 것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다들 이런 말을 하겠지.
"아니, 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해오던 시절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