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거르고 도서관 다녀오는데 비 시작한다.
마른 시멘트 바닥에 점점이 빗방울이 번졌다. 머리 맴돌며 간지럼 태우는 파리처럼 윙윙 떨어지는 비 털며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부채만 한 호박잎에 후드득 빗물 튄다. 아까보다 굵어졌다. 북대기듯 좁은 화단에 어깨 부딪고 선 토마토, 고추가 생전 처음 장맛비를 맞고 섰다. 껑충한 키에 떨떠름한 표정. 사계절 있는 이 땅에서나 한해 살이지 저 나던 곳에선 나무처럼 자라는 게 고추며 가지다. 저저이 따지면 사는 환경에 치이고 마는 게 더운 입김 토하는 것들의 생리다. 빛나는 족보나 누르께한 곰팡내 나는 핏줄이나 산이건 바다건 사는 조건에서 산놈이 되고 뱃놈도 된다. 뱃구레에 선학이 둥지 틀든 썩은 창새기 들앉든 사회적 조건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같은 세월 똑같은 물 먹고도 노란 콩나물이 나오는가 하면 허리부터 배배 꼬인 파치가 나오기도 하는 거다. 같은 옹달샘의 물을 먹고 뱀은 독을 내고 소는 우유를 만든다.
아침 먹고 서안(書案)에 앉았는데 문득 생각난 바 있어 집 나섰다.
자전거로 달려 마트서 음료 두 상자 샀다. 시내 나가는 길목의 궁전 모텔을 돌아 유록 마을로 향했다. 여린 솔순이 바늘닢으로 바뀐 숲에서 배릿한 여름 냄새가 풍겼다. 앞다퉈 피고 지던 봄꽃 가고 정액 냄새 닮은 밤느정이 떨어지고 밭터서리엔 망초꽃이 지천이다. 치렁치렁 잡히는 건 무어라도 기어오르는 칡덩굴 끄트머리에 초록색 꽃술 밥알처럼 매달렸다. 자연의 순환이란 봄부터 피는 꽃의 연속이란 생각이 든다. 식물의 생활사도 저가끔 달라 봄에 수정하는 놈, 여름에 꽃을 여는 게 다르다. 가을까지 피고 지면 열매를 떨구고 겨울 찬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새도 봄에 날아와 가을에 돌아가고, 가을에 돌아와 남녘의 따순 겨울을 나고 봄 되면 북쪽으로 돌아간다. 이 땅에 붙박인 나무나 물고기, 사람이 흔들리며 살아간다. 나무도 물고기도 사람처럼 시름 앓으며 산다.
깔끔하게 퍼논 흥해 배 씨 선대의 행장만큼이나 정돈된 비각의 비문. 마을 정자 연못은 연보다 마름이 우세하다. 수생식물인 마름은 작은 진분홍 꽃이 새끼 기생처럼 앙증맞고 이쁜데 욕심은 많아 해마다 물의 영토를 넓혀간다. 구석에 오종종 몰린 수련이 초라해 보일 정도다. 예부터 가을에 딱딱한 마름 열매를 구워 먹었다. 보오얀 속살은 밤맛이 났다. 겨우내 놀던 물오리 보이잖고 구름 사이 얼비치는 초여름 햇볕이 자잘하게 퍼진다. 전동휠체어와 자전거를 세워놓은 마을회관 앞에서 자전거를 멈춘다. 음료 한 상자를 내리고 남치기는 단단히 묶었다. 회관에서 나오던 아주머니 둘이 반기며 알은체한다.
'오랜만이시더'
'아이고, 뭐하려고 뭐를 그쿠 사오니껴?'
'허허, 암것두 아니시더'
부끄러운 맘 들어 황황히 말 주고받으며 유리문 밀었다. 어르신 일자리 사업하는 날인지 형광색 조끼 입은 노인의 눈들이 커지며 문께로 모인다.
'잘들 지냈니껴? 올만이시더'
'이기 누꼬? 산불 아저씨 아니껴?'
엉거주춤 앉은 채 허리를 젖힌 배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입속이 시커멓다. 막 일 나가려는 참이라고 했다. 주방 벽에 붙은 텔레비전에서 '아침 마당'이 나온다. 냉장고에서 묵은 반찬통을 죄다 꺼내놓고 행주질하던 유 씨 아지매가 허둥대며 다가온다.
'여행 간다 카더마는 갔다 오싰니껴?'
'아 예, 울릉도랑 지리산 한 바퀴 돌아왔니더'
'어어, 울릉도 일주도로 개통됐다는디, 한 백 리쯤 될동?'
배 노인이 부럽단 눈치로 거든다. 이 마을은 배씨 집성촌이다. 그래서 남정네는 죄다 배 씨고 노인들만 사는 동네라 모두 배 노인이다. 잔잔한 웃음으로 반기는 노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아 보였다. 노인들의 환대받으며 소파에 앉으니 뒤늦은 땀이 이마에 배어 나온다. 손수건으로 땀 씻으니 누군가 커피 타 준단다. 커피보다 시원한 물 달라고 해서 마셨다. 노인들이 일 나갈 채비라 담에 또 들리겠단 인사 남기고 서둘러 회관을 나왔다. 먼저 나간 할매 한 분이 조용히 유모차를 밀고 멀찌감치 간다.
이만여 평의 범들 들판의 벼 포기는 갈수록 시꺼매진 종아리 드러낸 채 바람에 찰랑거린다. 부산한 모내기도 드넓은 논이라도 기계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게으름 피워도 열흘이면 뒤집어쓴다. 이앙기 없는 집은 날 잡아 빌려 쓴다. 모판에서 모 찌고 못춤 던져 얼굴에 흙탕 튀어도 추석 무렵 풋바심해다 고슬고슬 김 오르는 쌀밥 생각하면 신나던 시절이었다. 소작인으로 살던 때 절반 도지 떼고 절반에서 농약, 품값, 물세 떼고 나면 남는 거 없어 겨우겨우 보릿고개 나물죽으로 면하던 시절 아니니 나이들어 해 다르게 근력 떨어져도 요즘 기계 농사는 마당 덕석이다. 편케는 되었으나 노루꼬리 만치 남은 세월이 아쉽고 눈물겹다. 노인들이사 죽을 동 살 동 손이 갈퀴 되도록 산으로 들로 나물 고사리 꺾어 키운 자식들 대처 나가 저가끔 살아가니 대포소리 안나는 세상 피난 보따리 쌀 일 없어 좋으나 세대 간에 사는 셈속 다르니 때마다 고기 끊어 부치고 명절마다 돈봉투 내밀어도 허전한 건 매한가지다.
'품 안에 있을 적 자석이지 발목 굵어져 가속 데불고 사는 참에 애비 에미보다 더 알고 많이 배운 것덜 그저 네 말이 옳거니 믿고 바라보는 것밖에 무신 용빼는 수가 있일라꼬... 그저 오며 가며 이웃보다 번쩍번쩍하고 큰 차 몰고 나타나면 짓무른 눈 가늘게 찢어지도록 웃어 젖히는 게 낙이면 낙인데 인생이란 게 도시 알다가도 모를 이치긴 해도 날만한 농투사니 더는 길게 뱉을 침 없으니 본 대로 산대로 가늘게 싸고 산다만 서산에 해 기울고 긴 밤 찾아오면 기름 아끼잖코 보일러 왕왕 돌려 뜨끈뜨끈 방 뎁혀도 옹두리 뼈 시리듯기 가심 시린 건 우짤 수 없잖나 그말이시 내사 몰것다...'
모두 사는 것에 열중할 뿐이다.
꿩밭골 김 씨 아지매는 집에 있었다.
이웃집 동서 아짐은 아침 일찍 건정 마을로 걸어가서 시내 가는 버스 타러 갔다. 눈에 희끄름하게 막이 씐 것 같이 보이지 않아 안과 찾아갔단다. 동서댁네는 지난겨울에 영감이 세상 떴다. 요양병원에서 가셨는데 서방 죽고 나서 죄 지은 듯 허전해서 금방 뒤따라 죽을 것만 같았는데 여적지 몸 아프면 아들 사는 서울로 딸네 사는 대구로 뛰어다닌다. 큰일도 지나고 나면 차차 잊히는 게 세상 인정이다. 지울 수 없는 한(恨)이야 떠나도 남지마는 환(幻)으로 돌리면 살길 열릴까. 모두 가뭇없는 희망이다.
'손주며느리까지 봤는데 무신 여한 있일라꼬... 내사 마 오십 넘은 아들 딸 총각 처녀 몽달구신으로 늙어 죽을까 걱정이더만 인자는 시집장개 꿈 내삐린지 오래다. 노가다하는 큰아들 비 오면 공쳐 걱정이고 더우면 팥죽 같은 땀 뽈뽈 쏟아감스로 고생하는 거 맘 아플 뿐이제, 술이나 덜 처묵고 그냥저냥 맘이나 편케 살았심 원도 없겠니더...'
아들 좋아하는 청양고추 마당귀 심어놓고 하루하루 무성한 섶에 풋고추 우렁우렁 달리는 거 쳐다보는 낙으로 사는 꿩밭골 김 씨 아지매 오래 묵은 천식으로 고구마밭 김매지 못했다고 한걱정이다. 허리 굽히면 숨 턱턱 막히는 게 그저 죽을 맛이란다. 그나마 신새벽 웃말까지 걷는 게 큰 운동이다. 동네 아짐들 마실 오면 화투 치는 코딱지 만한 주방 겸 거실문 활짝 열어놓고 산불 아재 찾아주었다고 적잖이 흐뭇한 얼굴이다. 수돗가에 그늘 삼아 올린 포도나무엔 벌써 하얀 봉지를 씌웠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알알이 소담한 초록 포도알이 모신 듯 들어찼다.
길 건너 딱 벌어진 살구나무엔 벌겋게 익은 살구가 주렁하게 전구 켜논듯 비친다. 축사 옆으로 빈 밭엔 도지 얻은 인삼 농부가 청밀 갈아엎고 새로 뿌린 옥수수가 무릎만큼 자라 있다. 그것도 갈아엎고 가을엔 삼포를 낸단다. 개성서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터 잡은 풍기 인삼도 진 빠진 인삼밭서 더는 갈아먹지 못해 북상 중이다. 강원도 경계까지 골짜기마다 죄다 삼포 그늘막으로 물결친다. 작물도 전과 다르게 병해충이 들끓는다. 하늘로 배로 물물이 교역이 늘어가니 철통같이 막아도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드는 딴 나라 병해충은 시나브로 늘어가니 세분화된 농약은 비싸지고 농사 지어먹으려면 오르는 생산비를 감당하지 않고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땅 갈아 살아온 농사꾼의 천직을 하루아침에 작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 씨 아지매와 커피 마시며 세상 얘기 나누다 일어섰다.
유모차 밀고 길까지 따라나선다. 가끔 자전거 타고 운동 나올 때 들르마고 했다. 강원도 광산촌에서 청청한 나이 사십에 남편 따라 자리 잡은 봉화 골짜기.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살아온 게 꿈만 같단다. 돈이사 죽으면 짊어지고 가는 거 아니라 내사 돈푼 모아논 거 없으니 맘이사 편타고 눙치는 아지매 속정이 실은 깊고도 따숩다. 우연히 만난 인연이 모아져 삶이다.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속엣말 나누는 관계 어디 흔한 일인가. 내성천 천방 길 달린다. 낼부터 장마라는데 오늘 행보하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다음 여행을 머릿속에 그리며 읍내 쪽으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