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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

by 소인

상추

어제저녁 답에 심은 상추는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아침을 맞는다는 기분은 공간의 양상에 따라 다르다. 바다나 숲이 보이는 휴가지의 펜션 이층 난간이나 어이없게도 유치장에서 맞는 아침.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 섞여 몽유병자처럼 고단한 밤을 보내고 더듬대며 기억을 되짚는 유치장의 아침은 끔찍하다. 오래전 경험이다. 아침은 구태의연한 시골 읍의 공기처럼 진부한 소란이다. 건너편 빌라의 층마다 아침을 여는 소리가 마른 낙엽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때로는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났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상추 모종은 전에 없이 생경한 풍경에 낯설어하면서도 밤새 언 몸을 녹이느라 잠자코 햇발을 기다렸다. 순해 보인다.

뉴스는 동서남북의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조금씩 변형된, 업그레이드된 얘기가 날마다 꾸역꾸역 국수틀에서 국수 나오듯 밀려 나온다. 한심한 꼴이지만 그것들을 자양분으로 세상은 돌아간다. 활력을 얻거나 실의에 빠지거나 모종의 음모를 키우면서 말이다. 종북 좌파를 우려먹는 사람이 토착 왜구로 찍혔다.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은 먼지만큼이나 보잘것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건의 변곡점에서 개인의 사상과 행동이 헤게모니로 등장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개인의 일생에서 벌어지는 우연성과 우연한 사건에 포개지는 개인의 의지, 거기에 시대 인식이 관여한 결과로 역사는 중첩된다. 모든 객관적 상황 자체로 역사적 진실이 판가름 나는 건 아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진실을 주도하는 혁명적인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역사는 소수의 사상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의 입장에서도 완전한 객관적 기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세대 정도의 진통을 통해 역사적 진실은 과오와 함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릇된 시대 인식으로 비롯된 경직된 생각을 끌고 가는 사람은 발전이 더디다. 과거의 헤게모니를 현재에 대입한 주장을 거듭하는 건 비겁하거나 게으르다. 역사가 벌어지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역사는 퇴보한다. 역사는 더 잘살아 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님 웨일스가 만났던 사회주의 혁명가 김산, 백십 년 전 일본의 영웅 이토오를 저격한 도마 안중근,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항소를 포기하고 떳떳하게 죽음을 맞으라는 안중근의 어머니. 독립투사들의 신념과 결기가 오늘의 한국을 지탱한 힘이다. 식민시대의 매국 매판자를 벌하지 못한 결과는 이후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강원도 바닷가에 살 때 상추를 길러 먹었다. 민들레 씨만큼 가벼운 상추씨는 후 불어도 화들짝 놀라며 저만치 날아갔다. 텃밭의 상추는 보드랍고 푸짐한 이파리로 무쩍무쩍 자랐다. 초여름까지 쌈장 하나로 고소한 상추의 풍미를 즐겼다. 병조림한 꽁치 살을 얹어 입을 한껏 찢어 쌍추 쌈을 욱여넣으면 한참 동안 말도 못 하고 우적댔다. 자고 일어나면 영토를 넓히는 상추는 방문객의 봉지에도 가득 담겨 나갔다. 내 입맛에는 파마머리 닮은 꽃상추보다 적치마가 맞았다. 쌉싸레한 풀냄새가 입안 가득 퍼지면 이슬 흠뻑 젖은 풀밭에 앉은 기분이다. 상추쌈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다. 쌈 먹은 뒤 나른하게 찾아오는 졸음에 겨워 누우면 마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배를 쓸었다. 바닷쪽에서 짭조름한 해초 냄새가 파도에 밀려 방을 채웠다.

상추와 뉴스는 일상에 틈입하는 흰불나방 같다. 광식성의 흰불나방 유충은 수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폭식한다. 일정 면적에 대 발생하면 작은 숲 하나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한여름 성장(盛裝)한 나뭇잎 사이로 태양의 물결을 보기도 전 그물처럼 엽맥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는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 시가지를 보는 느낌이다. 얼마 전 '버선발 이야기'라는 제목의 소설을 낸 백기완 선생이 말했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잘 살아야 한다. 네남없이 두루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성성한 백발 휘날리며 힘주었다.

사람과의 관계인 삶에서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운행과 지구라는 초록별의 생과 사에서 초월한 존재는 신밖에 없다. 신이라고 하면 종교를 떠올리겠지만 내게 신은 인간과 닮은 품성의 그리스 신화의 신을 의미한다. 인간 사이에서 교감하는 그리스 신은 욕망도 눈물도 쾌락도 꾸밈없이 생성하는 존재다. 유일신 여호와나 만인에 두루 미치는 불성으로 해탈하는 붓다와는 결이 다르다. 교회를 보지 말고 절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마음에 닿는다.

상추는 자체의 성질로 병이나 벌레가 틈타지 않는다. 깃털보다 가벼운 씨에 애욕의 번민이나 물욕의 고통을 담지 않았다. 상추의 유전적 형질은 생김새의 차이로 나타날 뿐이지 본질의 성정은 타고난 것이어서 푸짐한 미각과 졸음을 선사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예찬한 미국 야생 사과나무와 대등한 반열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요즘엔 상추나 쌈채소에 근육을 키우는 약을 친다고 한다. 유통과 보관의 수명을 늘린다는 이유로. 어린아이에게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적 인식이 없다. 그저 색깔이 다른 차이만 느낀다. 인간은 학습의 결과로 세상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차별적 시선을 키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다양성은 물론이고 개성을 혐오한다. 일체적 진리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가족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가족에게 희생하고 상처 받는다. 전통적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 성장하는 것이 맞다. 생성과 사멸이 우주 순환의 법칙인 것처럼 그 속에서 유의미를 찾는 행위 또한 삶의 법칙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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