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단지의 맨 꼭대기에 올라왔다.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든 주택단지에 입주한 집은 한 집뿐이다. 나머진 크기에 따라 조성한 대지에 풀만 무성하다. 듬성하게 심어놓은 어린 소나무가 파묻힌 마른풀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잡풀에 양분을 죄다 뺏긴 탓인지 좌우로 벌린 가지가 앙상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읍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의 조망은 불가하다. 읍의 반쪽이 석양 너머로 펼쳐졌다. 시내에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오다 읍내로 빠지는 내리막길의 오른쪽 산비탈이라 택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위치다. 바로 밑에 회전로터리가 있어 좌우 차의 꽁무니를 살피며 도는 운전자는 전방 위쪽의 풍경에 눈을 담기가 어렵다. 개울 없는 평지도 아닌 비탈에 조성한 택지라 입주율이 현저히 낮은 모양. 덕분에 가끔 호젓한 이곳에서 아래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시간 보내곤 한다. 숲이 회색빛 어둠에 잠기면서 호로록 산새 소리가 부산하다.
택지 위로는 야트막한 산의 풍치를 솔숲이 그나마 보태곤 있어도 아카시나무와 칠기 덩굴, 잡목이 대중 없이 자라는 식생이다. 드문드문 보이던 쑥부쟁이 꽃도 서리 몇 차례에 쏙 들어갔다. 마른 갈참나무 이파리가 배배 꼬인 채 매달려 늦가을 바람을 맞는다. 산그늘에 일찌감치 묻힌 궁전 모텔에 제일 먼저 불이 켜진다. 원추형의 지붕을 세운 모텔엔 오늘 밤 어떤 투숙객이 묵을까. 빨강 보라의 네온 간판이 점멸하며 집 나온 사람을 부른다.
한때 모텔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관광지 급의 모텔은 쇠락한 반면 소읍 주변의 새로 생긴 건 시설이 깔끔하단다. 길 가다 밤보다는 낮 동안의 휴식을 도모했다는데 우연히 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데서는 바로 아래 강이 흐르고 산과 하늘의 잔설이 투명한 수채화 같은 풍경을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본 적도 있다. 마치 일본 중부지방의 온천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함께 온 여자는 풍경 따윈 상관없는 듯 목에 팔을 감고 눈을 가늘게 뜨곤 했는데 그때서야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거였다. 매 순간 충실할 순 없어도 그녀의 바람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어서 바람처럼 욕실로 달려가곤 했단다.
관계란 관계 자체의 육적인 교감보다 의식을 흔드는 상상이 쾌감을 더한다. 젖은 몸을 말리며 침대에 누워 욕실에 들어간 여자의 물소리를 듣는 게 더 자극적이었다는 친구는 문을 열고 닫는 소리, 물 끼얹는 소리, 젖은 몸에 거품이 부풀고 씻어내는 소리가 연해 들리며 덩달아 달뜬 기분에 도취되고 마는 것이란다. 좀 지루하다 싶은 시간이 흐르고 여자가 허술하게 몸을 가리고 들어서면 마음은 둥싯 달 뜨듯이 파도를 타기 시작했더란다. 자기 성에 대한 주체적 여성도 외로운 여자도 많은 세상이지만 식색본성이란 삶의 도락도 조락한 가을 기운처럼 스산한 중이다.
호로록하던 새소리가 잠잠해진다.
어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래로 내려가려면 최소한 미등을 켜야 시야가 확보될 것 같았다. 긴 밤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시간에 불을 켠 차들이 꾸역꾸역 밀려 내려오고 시내 쪽으로 기어든다. 일터에서 집으로 향하는 차들의 움직임은 나른하고 엄숙하다. 밥을 버는 벌레의 소음이 지구를 달구고 파먹은 흔적이 하늘의 구름처럼 희미하다. 생명 현상은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섞여 있는데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밀어내는 형국이다. 밥과 술을 먹으며 그런저런 얘기에 골몰하면 살아 있다는 충동을 받지만 늘 죽음은 말석에 앉아 산자의 표정을 살핀다. 어느 때고 타이밍이 맞으면 챔질 하는 낚시꾼처럼 흔들리는 삶의 순간을 끈질기게 노리는 것이다. 여명이 부연히 일어나고 어둠이 사라지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갈대숲 너머로 찰방이는 물고기처럼 비로소 죽음의 환영은 또 한 차례 물러가곤 하는 게 삶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도 긴장을 이어가기도 뭣한 것이 자잘한 일상이 모든 걸 흩트려놓기 때문이다.
배우는 데에 나이는 없다. 그건 지식의 문제보다 성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삼십 년 전의, 그러니까 한 세대 전의 대학 졸업자가 대학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는 오늘에 와서는 모두 사라졌다. 쓸모없는 과거의 찌꺼기가 된 것이다. 쓰레기산을 치우며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는 건 현장과 밥의 과정을 경험하는 개인의 몫이다. 왕성한 일의 과정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 못한 걸 이제 와서 들여다본다. 공부의 재미. 각성과 성찰이 반성의 토양으로 밀어붙인다. 인생은 끊임없는 후회와 반성의 과정이다. 미완인 채로 떠나는 게 존재의 숙명이다. 아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몇 순간이나마 주체적인 자각과 의지에 따른 삶이었다면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생경하거나 범박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단 의미다.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판단과 결정은 다르다.
뜨물에 좆 담그듯 일반론을 상황론에 대입에 이용하는 게 정치꾼의 특기다. 그것들은 걸핏하면 국민을 앞세우고 국민을 우려먹고 선거판이 되면 절하고 읍소하다 선거가 끝나면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국민을 차 버린다. 순진하게 손 빨고 있다간 서너 차례 싸대기가 낯짝을 후려갈기고 지나가는 꼴이다. 그런 경험을 역사적으로 되풀이하는 건 불운하다. 물론 역사가 정반합의 논리로 발전한다는 믿음은 현실에선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역시 문제는 민중의 자발적 노력에 의한 희생을 담보로 세운 시스템이다. 인민을 먹이로 개인의 입신영달을 탐하는 정치 모리배의 대오각성을 기대하는 건 예나 제나 마른나무를 비틀어 물을 짜내는 격이니까.
하루치의 밥을 번 차량들이 어둑한 길 더듬어 집으로 간다. 85일째 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 노인이 바라보던 석양에 잠긴 바다의 하늘도 저렇게 검붉었을 거다. 노인이 걸어 올린 자존심을 공격하는 상어 떼는 도처에 도사린다. 빈 그물이어도 바다와 함께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가시만 남은 청새치와 갈앉아도 그만인 노인은 쓰러지듯 잠들어 사자의 꿈을 꾼다. 젊은 날 희망봉을 지나다 본 초원의 사자는 산티아고 노인의 꿈에 자주 나타난다. 우리도 자유로운 정신 하나쯤 품고 산다. 그것이 이승을 다하는 동안 현현하거나 천 길 암흑 아래 묻히든 꿈은 허방해도 살게 하는 힘이다. 스르르 미끄러지던 앞차가 급정거한다. 내 얼굴에 빨간 미등의 그림자가 핏빛으로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