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by 소인


날씨가 푹하다.
며칠 전 개울을 꽁꽁 얼렸던 찬바람이 물러가고 화풍이 분다. 토라진 애인에게 말 걸어도 순순히 돌아설 것 같은 보드라운 날씨다. 겨울 볕이 마른풀 위에 눈부시게 쏟아진다. 솜털을 다 털어내고 홀쭉한 몸으로 흔들리는 갈대의 물결이 황금빛으로 타들어 간다. 냉동창고의 서늘한 냉기 감돌던 소나무의 뾰족한 바늘잎이 순한 초록색을 띠고 반짝인다.

농촌의 것들은 계절에 따라 살고 죽는 느낌이 다르다. 심장이 뛰고 혈관으로 피가 돌듯 수목의 뿌리에서 힘차게 빨아들인 수분이 물관을 통해 나무의 가지 끝까지 이어진다. 잎은 푸르고 청청하다. 생명 활동이 진행형인 것들은 제 몸의 열락과 느낌을 눈부시도록 뿜어내고 소진한다. 생명의 현현(顯現)인 자연의 대사 활동은 자체의 생성하고 배설하는 기운만으로도 싱싱하게 살아 꿈틀댄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다.
산 것들은 일손을 놓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난다. 수목은 반쯤 눈을 뜬 채 가수면의 겨울잠을 잔다. 언 땅속은 물기가 멈추고 가느단 호흡이 실뿌리처럼 파근하게 깔렸을 뿐이다. 빈 밭에 널브러진 마른 깻단이 지나는 바람에 몸을 떤다. 한쪽에 세워놓은 농기계는 숨넘어간 괴물처럼 미동도 없다. 심장의 전류가 흐르고 불꽃이 튀면 괴물의 몸에도 피가 돌고 되살아 움직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산과 들의 휴면기다.

계절과 상관없이 일상의 움직임을 계속하는 건 인간 종이 유일하다. 그들은 냉혹한 날씨의 변화에도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죽어라 소비하고 생산한다. 지금은 낮의 소요가 죽음처럼 갈앉은 밤이다. 깨어 사고하고 움직이는 것 또한 사람일진대 낮의 밝음과 불화하는 사람이다. 그의 어둠은 사유의 불빛이며 모든 불가능의 가능성이다.

작가는 밤을 조심하라고 했다. 소란이 잠든 적막한 상태에서의 사유란 감정적인 창작이 틈타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밤새워 쓴 글은 낮에 다시 보아야 한다. 가는 퇴고의 체에도 무수한 문장이 걸러진다. 형광빛으로 반짝이던 찰나의 섬광과도 같던 단어가, 모음과 자음의 기가 막히던 조합이 여지없이 깨지고 부서진다. 낮의 이성은 밤의 감성을 일순에 날려버린다.

그래도 끈질기게 밤과 교유하는 습성은 창작하는 사람과 외로운 이의 전유물이다. 밤으로의 사념(思念)과 창작의 정념조차 수습하지 못한다면 그의 운명은 난망할 거다. 고양이도 잠든 밤 깨어 있는 자는 홀로 깨어 있음을 자신의 시공으로 독점한다. 상상은 이성을 간단히 뛰어넘고 생각의 갈피는 대양과 산맥을 관통한다. 너와 나의 실존의 경계를 허물고 뜨겁거나 차가운 열락을 나눈다. 운명적인 삶의 맥을 짚어 치명적인 살기를 급소에 내려친다. 나를 제외한 잠든 것들의 운명을 연민하고 저주한다. 나를 어둠에서 견인하고 무로 돌려놓으며 공허한 욕망에서 도려내고 침몰시키는 순간이다. '살면서 회의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생물학적으로는 숨을 쉬고 살아 있는 존재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무의미한 삶이다. 회의는 절망과 한숨이 아니라 살아온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해석의 과정이다. 그것은 자아의 타성화된 일상에 타협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다.' 인문학자 김경집의 말이다.

겨울밤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꿈꾸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끝없는 좌절과 고통도 인간을 허물지 못한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와도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무화시키지 않는다. 얄팍한 지식의 체계보다 무지한 삶의 강인함이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번민하고 사유하는 쪽은 나약한 인간의 정신이다. 고통을 택하는 그는 어둠 속에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살아 꿈틀대는 건 세계와 삶을 향한 자유 의지다. 형형(炯炯)한 생명을 구가하는 정신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