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 11 일째.
계곡 물은 어제보다 줄었다. 물소리는 잦아들었지만 가느단 흐름을 유지한다. 숲의 기능 중 하나가 물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거다. 폭우가 쏟아지면 물을 담을 그릇이 없는 민둥산, 절개지 등은 직수(直水)의 충격에 땅은 갈라지고 산태나기 일쑤다. 수목의 뿌리와 두텁게 깔린 낙엽층, 부엽토는 스펀지 역할을 해 빗물을 흡수한다. 그런 다음 서서히 밖으로 배출하기 때문에 직수의 충격을 완화한다. 깊은 숲은 늘 맑은 샘을 뿜고 시원한 물길을 낸다. 동식물의 안식처다. 식물의 뿌리는 토양을 움켜쥐고 토사유실을 방지한다. 잡초는 원래 그저 야생풀이었으나 인간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논밭의 잡초를 제초제로 뿌리까지 죽이면 토양의 유실을 촉진하는 꼴이다. 풀은 베어주는 게 낫다. 그러나 바쁜 농부는 풀 베는 수고를 농약으로 대신한다. 모내기 전 논두렁에 부지런히 올라온 쑥, 냉이는 고엽제의 폭격을 맞아 누렇게 죽어간다. 수확철도 아닌데 들판이 황금빛이다. 요즘 봄날 논틀 밭틀에서 냉이 쑥 캐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
당직실에서 충분히 잤음에도 몸이 무겁다. 삼 교대는 인간의 신체를 무시한 노동 규칙이다. 아침과 점심, 저녁과 밤이 하루인 것처럼 9 to 6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선순환이 몸과 정신에 알맞다. 백세시대는 은퇴 이후의 기나긴 말년을 고독과 빈곤, 질병의 나락으로 내모는 새로운 지옥이다. 과학은 인간을 점점 막장으로 내몬다. 퇴근길에 집에 들러 아이스팩을 담고 지붕 위의 호박을 땄다. 투명한 연둣빛 살결이 보석 같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이른 출근을 서두르는 차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다. 꿈이라 부르는 욕망의 현장인 삶에서 탈것인 차는 현대에 와서 주요한 수단이자 애물이 된 느낌이다.
욕망은 욕망 자체로선 활동하거나 증식하지 않는다. 욕망의 숙주, 즉 동물의 신체에 기생하여 이동, 변이, 진화한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생물학적 욕구만을 지닌다. 생존본능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욕구의 발현은 먹이 사냥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냥, 약탈, 침략은 먹이 쟁탈의 갈래인데 싸움의 원인이 된다. 일부 동물은 사회생활을 통해 먹이를 생산하고 저장한다. 모든 생명현상이 멈추는 겨울에 대비하여 먹이를 저장한다. 생존의 지혜다. 그러나 거기에도 생존본능 외의 잉여 욕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은 호기심이 원천이지만 더 많은 쾌락과 주변의 관심을 원할 때 욕구를 뛰어넘는 욕망하는 상태가 된다. 자연계의 바이러스 또한 이와 닮았다.
욕망과 바이러스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무생물의 상태로 숨죽이다 욕망의 흡반이 활착 하면 왕성한 활동을 개시한다. 자신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욕망은 덩이줄기로 새끼 치며 정주하지 않고 유목하는 리좀을 닮았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하는 것처럼 욕망도 시대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며 확장한다. 사람들은 포스트 코로나의 전망을 얘기하지만 변종의 바이러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수가 노래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속성은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이다. 파멸과 소거로 이어지는 건 순환의 운명인데 결국 영속이란 존재하지도 바라지도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아서 무한 변주를 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소거는 무시로 우리 곁을 파고든다. 인도의 명상가 오쇼는 '자연은 크지만 인간이 만든 관념은 더없이 하찮다. 인간이 만든 관념은 깔때기와 같아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져서 마침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때 그 깔때기가 그대의 무덤이 된다. 모든 인간이 직면해 있는 문제가 이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욕망의 무덤을 파고 그것에 들기를 원하는 삶일 뿐이다. 양심적인 지도자가 욕망의 부스러기 하나로 자신의 삶을 망친 경우를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욕망을 떠나서 한시도 살 수 없다. 유아등(誘蛾燈)을 향해 돌진하는 하루살이처럼.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은 '삶이 본질상 성장 과정이고 완전해지는 과정이며 통제와 폭력 수단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면 삶에 대한 사랑은 모든 종류의 사랑의 핵심이다. 사랑은 인간, 동물, 식물 안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삶에 대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고, 모든 종류의 사랑에 포함되어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핵심이다.'라고 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타인을 욕망하고 원하고 집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 포스트 코로나의 모습은 사는 방식에 대한 재정립이며 또한 사랑에 대한 재고찰이다. 새로울 것 없는 펄펄 뛰는 활어 같은 화두다.
자가 격리가 무사히 끝나면 난민 생활(?)도 끝이다.
아내는 벌써부터 피난 보따리 쌀 궁리다. 감사히 쓴 빈집 청소를 해야 하고 작은 집에서의 여름살이 계획에 몰두한다. 외국의 확진 뉴스는 여전히 심상치 않다. 질병관리대책본부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안전문자를 보낸다. 거리두기, 손 소독 철저, 소모임 자제 등 생활수칙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휴가철이 다가온다. 지루한 장마 끝나고 산과 바다로 달려가는 사람들 끊이지 않을 터다. 아침 먹고 아내는 일터로 떠났다. 소읍 가운데 위치한 아파트는 학교, 유치원이 다닥다닥 붙었다. 등교하는 아이, 출근하는 엄마, 공사장의 소음이 커지고 나는 고단한 몸 누이고 잠 속으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