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江岸)을 배회하기는 올여름, 정확히는 7월 7일 루거우차오에서 일본군이 전쟁의 빌미를 잡은 이래로 참 오랜만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느긋하게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산책이란 참으로 좋구나. 그리고 이를 바이 샹(白想)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백상(白想)은 홋타 요시에(堀田善衛)의 소설 「시간(時間)」에 나오는 단어다. 백(白)은 희다 청결하다 텅 비다 쓸데없다의 뜻으로 쓰이고, 상(想)은 생각하다 추측하다 바라다 그리워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백상의 결합어는 사전에 없으나 '시간'의 주인공은 어디에서 산책의 의미로 쓰이는 백상을 보았다. 1937년 일군에게 난징이 함락되어 20~30만 명의 중국군과 민간인이 학살되는 참극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중국군 해군부의 문관이다. 자신의 집을 사용하는 일본군 장교의 하인으로 살고, 밤이면 지하실에서 중국 정부에 무전을 보내며 난징에서 목도한 참상을 일기 형식으로 써 나간다. 만삭의 부인과 다섯 살 난 아들, 여자 조카를 잃은 그는 무너지는 정신을 붙들고 끔찍한 현장에서 목숨을 밥풀로 이어 붙이듯 살아간다.
강간, 약탈, 살인이 벌어지는 난징의 상황에서 '바이 샹 白想'의 낱말은 생뚱맞지만 주인공은 극한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폐허에서 산책을 떠올린다. 산책은 집 밖으로 떠도는 행위다. 생각할 것이 많거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잠시의 탈출을 모색한다. 정리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착상이 솟기도 하지만 산책 이후의 상황은 점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도들과 산책하면서 강의하고 논의하며 유래된 소요학파는 산책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설명한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인간이 사냥이나 위험으로부터 도주할 경우는 달리기를 한다. 그러나 생각을 다듬거나 아이디어를 궁리할 때는 천천히 걸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한다.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걷는 것과 산책은 다르다. 걷기 운동은 신체의 단련을 위한 것이지만 산책은 말 그대로 어슬렁대는 행위다. 산책에는 한가롭다, 볼일이 없다는 뜻이 담겼다. 산책이나 산보는 휴식과 건강을 위해 천천히 걷는 것을 의미하지만 느리게 걷는 휴식에는 휴식 이후의 결과물을 얻으려 하는 의도 무심결에 들어 있다. 주변의 풍경에 눈을 맞추거나 바람소리에 귀담으며 뇌리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사변을 들추어 늘어놓기도 정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산책하는 중에 얻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뛰어난 사상을 펼치기도 한다. 산책은 문학 장르 중 수필과 닮았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처럼 발길 닿는 대로 어슬렁대는 것인데, 마치 의식 없는 행동처럼 여겨지지만 밑바닥에는 의도가 다분하다. 만일 산책에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의도된 게 없다면 망연한 표정으로 걷는 몽유병자와 같을 것이다. 몽유병 환자는 깨고 나면 기억이 망실된다. 몽유 행위와 이후가 극명하게 분리된다.
일본이 이차대전(그쪽 표현으로는 대동아전쟁, 또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45년 패망까지 15년 전쟁이라 부르지만)에서 패전 후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전범들에 대해 전국 규모의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성인의 90% 이상이 사면되어 석방되기를 바란다는 응답이 나왔다. 바라지도 않는 아시아 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나라를 짓밟은 그들, 정권 아래 대다수 아니 전 국민의 전쟁에 대한 반성은 전무했다. 저들의 의식 속에 원폭 투하에 대한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얼마나 아니러니 하고 자가당착인가.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일본은 미워도 일본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건 군국주의로 아시아 각국을 식민 지배하고 약탈한 국가의 정체와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구분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권의 의도에 따라 동조하고 따른 국민은 무엇이란 말인가. 타인을 능욕하고 살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베어내고 주검을 버들가지로 고리를 만들어 강물에 띄운 짐승도 상상하지 못하는 짓을 저지른 아버지, 할아버지의 행위를 자식들은 어찌 두둔하고 이해한다는 건가. 역사는 과거와 지금이 맞닿은 시간의 흐름이다. 침묵은 동조와 다르지만 같은 어휘다. 침묵하며 저항한다고?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분위기가 전체 맥락으로 이어질 땐 해석이 달라진다. 독재자 아래 숨죽이며 산 사람과 외치며 항거한 이들과 어떻게 같은 저울에 달 수 있는가. 너무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삶을 정치와 분리했을 때의 얘기고 외딴섬의 은자가 아니라면 정치는 당신의 잠자리에까지 파고든다. 은자도 무인도에서 시간의 칼을 갈며 현실의 복귀를 꿈꾼다. 일본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했다. 그럴 때의 일본은 국가라는 상징적인 대상이 아니라 위정자를 포함한 대중을 말한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존재는 분명히 있다. 존재는 분명히 있다. 자신의 생명을 반생명의 확산으로 사용하는 존재의 경우다.
타인과 공동체에 중간은커녕 해가 되는 존재는 당대에 끝나는 게 아니라 악을 재생산하고 대물림한다. 상생은 가로막히고 공동의 안녕은 위태롭다. 당하는 자의 고통은 끝이 없다. 피해자는 이를 갈며 밤을 새우는데 가해자는 발 뻗고 잔다면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다. 안타깝게도 권선징악은 동화책이나 교과서에서만 존재한다. 악인은 여전히 어깨를 흔들며 활보하고 당한 자는 억울함을 안고 죽어간다. 인내와 시련은 보상이 아니라 지금 행복한 상태를 거머쥐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의 양상으로 흘러간다. 피해자의 낭패감과 아 Q의 정신 승리는 열패감을 포장하는 데에 그치기만 할 뿐이 아니라 자아의 분열과 자존감의 추락으로 이어진다. 충신이나 효자의 '착한 행위'는 열녀비, 효자비를 세워 복종을 강요하는 지배자의 교활한 전략이다. '착한 사람'의 결말은 보상도 해피 엔딩이 아니고 인내와 굴종의 쓰디쓴 결말이다. 부조리한 상황을 감내하는 착한 이보다 저항하는 이의 자아실현이 우선이다. 인생은 짧고 보상은 가뭇하다. 아니 원래 인생에 보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사태의 군인들은 같은 동포인 민간인을 총검으로 도륙했다. 인간의 상상력에 미치지 못하는 행위라고 짐승인들 가능할까. 아마도 짐승은 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한 번뿐인 과거인 역사가 다른 얼굴을 하고 되풀이되는 건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고 토악질이 나온다. 구한말 항일 의병의 머리를 잘라 매단 일군, 녹두장군의 머리를 효시한 관군과 일군을 시작으로 고비마다 처절한 학살이 거듭되었다. 독립군 토벌을 위해 마을과 들판을 불태운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전술을 배운 간도 특설대의 조선인 장교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복을 바꿔 입고 승승장구한다.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하고 불도저로 밀어붙인 행위는 구한말과 독립군 토벌대의 전술 교본을 따랐다. 잔인성은 시간을 거슬러 대를 이어 교환되고 이어졌다. 광주항쟁을 군홧발로 짓이긴 군대의 전술은 대물림의 결과다. 두 명의 응우엔이 유엔 인권위원회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달라고 진정했다. 일본의 새 총리는 한국 측에서 전범기업의 재산 몰수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방한하지 않겠다고 뻔뻔한 태도를 고집한다. 전후 독일과 대조적인 부끄럼 없는 국체일 뿐이다. 자이니치 혐한을 외치는 극우와 침묵으로 동조하는 일본 대중의 반성 없는 역사는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전투하는 국가로 만들려는 군국주의의 부활이다. 식민지배와 강제징용, 위안부 등 일본의 만행을 단죄하려면 그와 동시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사죄하는 행동을 보여야 이성적일 것이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전쟁은 총과 대포에서 공포로 진화한다. 자본 전쟁에서의 노예화된 노동자, 생태 파괴의 결과로 인간의 세상에 스며든 바이러스의 공격에 인간은 느닷없이 전시 상황을 경험한다. 타인을 감시하는 나조차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삶의 목표는 유실되고 어중간한 욕망을 욕망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미련과 아쉬움이나 억울함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애초에 그것들도 삶의 목록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모든 질문은 우문이다'란 시니컬한 냉소주의가 판친다. 국가와 제도, 전통과 습속을 거부하는 사태는 '자유'라는 말로 대표할 수 없다. 지구적 태생의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