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54)
저녁 먹자마자 어둠이 계곡을 감쌌다. 어둠만이 아니라 해거름 몰려오기 시작한 차가운 공기는 옷을 껴입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식후에 당이 오르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여름 내내 풀베기할 땐 당 수치가 반으로 떨어졌다. 의사도 눈을 크게 뜨고 빙그레 웃었다. 맘 놓고 소주를 땄다. 가을 들어 벨 풀도 없어지자 슬슬 당이 올랐다. 의자에 앉아 의자에 다리를 걸치니 이번에는 고개가 뒤로 젖혀지지 않는다. 등받이가 짧다. 밥이 들어찬 배가 불룩하다. 거북한 포만감이다. 어정쩡한 자세로 졸기보다 걷기로 했다. 강원도서 십오 년 동안 했던 수목관리가 생각났다. 회장은 한 번씩 내려오면 식사 후 솔숲을 걸었다. 다리를 끌면서 사명감을 가진 듯 기어코 발을 내디뎠는데 옆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의 노인의 집념이었다.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미국의 외아들에게 갔는데 고국을 그리워하다 운명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자 아들은 미련 없이 땅을 팔아치웠고 나는 쫓겨났다. 랜턴을 들고 계곡 위쪽으로 올라갔다. 낮에 봤을 땐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닌데 주위가 어둠에 묻히니 까마득하다. 아니 까마득하게 느껴진 건 돌아본 사무실의 불빛 때문이다. 빛이고 뭐고 없는 칠흑이었다면 거리감의 분별도 없었을 거다. 그(그녀)와의 경험이 있었기에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사무실 불빛이 하얀 점처럼 보이는 것처럼 그(그녀)와의 기억도 점차 멀어진다. 생각나는 건 침대 위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 급하고 격하게 지껄였던 내장을 들뜨게 했던 툭툭 끊어진 말의 조각뿐이다. 그녀의 하얀 손이 내 심장을 움켜쥔다. 봉숭아 꽃처럼 비명이 터진다. 바닥에 흥건한 허무의 씨앗들...... 기억 탓만도 아니어서 거리를 두니 몸도 멀어진다. 경삿길을 일정한 보폭으로 걷자 숨이 차오른다. 숙소의 불빛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갈팡질팡 비틀거리면서, 실제로는 전망이라 부를 만한 전망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거나 고개를 숙이고, 타인의 눈치를 살피거나 한숨을 쉬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느긋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유는 분류나 계열화가 용이한 것 같지만, 하나로 묶을 수가 없다. 이유는 공유가 아니라 사유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유화된 말로 이유를 얘기하려고 한다. 공유화된 말 같은 것으로 사유의 이유를 표현할 수 있을 리가 없다.'(「이쿠미나」 헨미 요)
일본의 사소설처럼 심리의 깨알 같은 정황이나 사상(事象)을 지루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쓸 말은 해야 한다. 인간은 숙명적인 세계관으로 소여(所與)된 삶을 받아들이기엔 억울한 심정이 든다. '멋대로' 살 수도, '멋대로' 살 이유도 없지만(이때 이유의 질문으로서의 '왜'는 완전히 소거된 상태다) 어쨌든 몰 주체주의보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게 후회가 적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이브하게 자유를 고집하고 살던 무렵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중국 앞바다에서 그물을 당기고 광산 막장에서 아연 원석을 캐다 산으로 올라갔다. 말하자면 육해공의 극한 직업을 섭렵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선원과 광부 생활은 꺼내지도 못할 만큼 일천하다. 한 분야를 집어내어 대화의 반열에 올리려면 적어도 수십 성상의 세월을 겪어야 곰삭은 혜안이 나오는 법. 소금쟁이는 표면장력으로 물 위를 미끄러져 간다. 소금쟁이는 수면 아래의 심연을 모른다. 아니 그의 일생에 까마득한 바닥에 대한 질문은 처음부터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인간도 그렇다. 전문가인 척 하지만 실은 표면의 현상을 긁어본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평생을, 몇 세대를 걸쳐 사물의 사상(事象)을 궁구하는 데도 바닥은 까마득한 심연이다. 얕은 경험은 동지나해의 우윳빛 바다와 우주 공간의 칠흑 같은 시간을 극히 짧은 순간 스치는 먼지와도 같이 맛본 데 불과하다. 기계톱을 들고 산등을 넘으며 고단한 밥을 벌다 강원도 땅에서 소나무를 심고 가꾸다 나이 들었다. '나이 들어 버렸다'라고 한다면 의지와 무관한 시간의 흐름이겠으나, 누구라도 그렇듯이 갈피마다 자신의 주관은 펼치고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지나온 역처럼 거쳐간 사념들은 돌아보면 부끄러움 투성이다. 헤아리면 숲에서 나무를 대한 일이 십여 년이니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자연과 생태에 대한 사유는 천박하고 낮은 온도의 앎에서 허우적댄다. 문장 또한 그럴진대, 잡문을 엮어 책으로 낼 생각을 하면 전에 쓴 글을 죄다 버리게 되니 그러지도 못할 형편이다. 지리멸렬한 사유와 중언부언의 언설, 잡인의 허접한 문장에 눈길 주는 이도 드물 것이다. 내가 '안다'라고 하는 건 그뿐이다.
과거는 현재의 얼굴이다.
좋든 싫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과거는 현재의 옆에서 기웃거린다. 잘 익은 술을 두고 떠나야 하는 술꾼처럼 걸음은 땅을 질질 끌며 미적거린다. 봄날에 떠난 사람이 낙엽 스산한 가을에 돌아온다면 잘 익은 항아리의 술을 꺼낼 순 있을 거다. 역사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옛일은 묻고 새로 출발하자는 꼬임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지금'은 과거로부터 퇴적한 지층이며 현재는 미래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욕망을 목표화한 사회의 시스템은 과거로부터 소환된 교훈을 매번 지혜로 불러내지 못한다. 문제는 패착(敗着)을 줄이는 데 있는 것이다. 반대로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외려 적반하장의 논리로 무장한다면 파국은 되풀이된다.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인데 거짓말도 못이 박이면 굳은살이 되어 진실의 탈을 쓴다. 파락호 아베 신조가 평화헌법을 전쟁 헌법으로 뜯어고치려는 데 핏대를 올리는 건,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대동아 공영의 군홧발과 총검에 아시아인의 살과 피가 터진 과거로부터 무화(無化)된 부패된 의식의 발로다. 과거가 없다면 존재는 사라진다. '바로 과거에 미래의 이미지가 있다. "확 벗겨내 버린 앞으로의 세상"이 미래에 선행해서 지금 올 수도 있다. 그것이 지금 다시 예전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과거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저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현재가 과거에 추월당하고, 미래에 과거가 다가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쿠미나」 헨미 요).
게으른 독서가 이어진다.
일과 틈틈이 책을 열지만 진도는 더디다. 천천히 읽기로 했다. '읽어 치우기'보다 선택한 책을 위에서 창자까지 남김없이 소화시키기로 하면서 편한 책 읽기로 돌아섰다. 재일 작가 서경식을 읽다가 헨미 요(辺見庸)를 만난다. 헨미 요를 읽다 홋타 요시에(堀田善衛)를 읽는다. 독서는 맥락이고 질문과 답을 찾는 여행은 무엇과 견줄 수 없는 도락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차이다. 여행은 목적지의 도착보다 과정에서 의미를 건진다. 아직도 오독에서 헤매는 편협한 책 읽기지만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와 오키나와의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真俊)과 전자의 작가들과의 사이에서 종종 까마득한 벽을 느끼며 희열을 맛본다.
시골에서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한다. 이른 봄의 냉이나 쑥은 밥상에 새뜻한 입맛을 날라다 준다. 단오 전까지 산과 들의 나물로 원기를 돋운다. 가을엔 도토리, 산밤이 지천이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겨울밤 이웃과 쌉싸레한 도토리묵을 맛본다. 줍고 빻고 치대고 거르고 말려 가루를 얻는다. 자잘한 일상의 도락이 없다면 삶은 자체로 지옥이었을 거다. 천지 불인(天地不仁)의 자연은 요지부동인데, 인간이 정을 붙이기도 저주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햇볕과 바람을 등에 지는 적요와 '쓸데없는 열정'이 삶의 밥맛을 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