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15) ②


줄 잇기 매듭은 낚싯줄이나 긴 줄이 필요할 때 짧은 줄을 서로 잇는 매듭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결과는 같다. 양 줄 끝을 가로로 지나게 놓는다. 마치 한 줄이 평행으로 겹친 형상이다. 왼쪽 줄 끝을 오른쪽 줄 밑으로 돌려 한 번 감는다. 다음 남은 오른쪽 줄과 왼쪽 줄을 홀쳐 묶어 양쪽으로 당기면 끝이다. 두 번째 방법은 왼손에 U자의 반대 모양으로 줄을 가로로 놓는다. 오른손에 잡은 줄 끝을 왼손의 U자 모양에 넣어 아래로 감아 돌려 다시 위로 U자에 넣어 양쪽 줄을 당긴다. 줄잇기가 완성된다. 나는 두 번째 줄잇기 방법이 쉽고 단단하게 느껴진다.

기둥 묶기 매듭은 간단히 기둥에 잡아맬 때 쓰는 방법이다. 왼쪽에 짧은 줄 끝을 놓고, 오른쪽에 긴 줄을 U자를 거꾸로 한 것으로 놓는다(여기까지는 유니 매듭과 같다). 왼쪽 줄을 오른쪽 줄 위로 넘겨 이어서 밑으로 넣어 위로 올려 돌린다. 돌릴 때 왼손 검지 위에 놓고 이때 넘어오는 줄의 중간을 왼손 검지로 걸어 아래로 검지와 함께 빼어 당긴다. 유니 매듭과 같이 당길수록 조여진다.

보우 매듭은 매듭으로 만든 고리 모양의 원이 고정되는 매듭이다. 당겨도 유니 매듭이나 기둥 묶기처럼 조여지지 않고 원래 모양이 유지된다. 배에서 던진 로프를 말뚝에 걸어 배를 고정시킬 때 쓴다.
요세미티 보우 매듭은 보우 매듭을 한 단계 나아가 더 튼튼하게 고정하는 매듭법이다. 왜 요세미티 공원의 이름을 붙이는진 모르겠다. 보우 매듭의 순서는 줄 끝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 줄 위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원을 만든다. 이때 원을 만들고 난 줄 끝은 다시 오른쪽에 놓인다. 다음에 오른쪽 줄 끝을 원에 통과시키는데, 방향은 원의 오른쪽 밑에서 원의 왼쪽 위다. 반쯤 통과시킨 후 줄 끝을 왼쪽 줄 밑으로 넣어 다시 원을 통과시켜 오른쪽으로 빼내 양 끝을 조인다. 이러면 만들어진 원은 고정된다. 요세미티 보우 매듭은 보우 매듭 완성 후 남은 줄 끝을 다시 묶는 방법인데 복잡해서 나머지 설명은 안 하기로 한다. 남은 줄을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방법대로 단단히 묶기만 하면 완성이니까.

여섯 가지의 매듭 방법을 설명했다. 동영상을 보고 익히면 간단할 것을, 말로 설명하려니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배운다는 건 지식의 일종이지만 지식 쌓는 걸 많이 알았다고 하는 건 틀린 말이다. 앎은 지식의 저장에 머물지 않는다. 앎은 지식의 습득에서 한걸음 나아가는 상태다. 인류학적으로 지식은 생존을 위한 습득 과정이다. 알아야 사냥하고 직업을 얻고 먹고살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면서 보다 완전한 생존과 삶을 위한 목표를 정하는데 그걸 꿈이라고 부른다. 가능할 정도의 목표는 꿈의 반열에 들지 않는다. 단지 '좋은 계획'일뿐이다. 꿈은 불가능을 전제로 도전하는 대상이다. 삶은 탐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도전하지 않는 꿈은 나태한 이상일뿐이다. 앎도 그렇다. 단순히 지식의 저장과 나열이 아닌 더 높은 지평으로의 확장성을 띤 게 바로 앎의 정체다. 얕은 앎은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가 삶의 주변에만 머문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흔적을 좇아가는 인문(人文)을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뜩잖다. '학(學)'이란 대상을 개념에 가두는 행위다. 삶의 무늬는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데 학이란 테두리에 가두면 더 이상 초월의 지평은 생성되지 않는다. 문학 철학 역사 등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현재를 진단하고 나아가는 인문 정신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인문적 지식 또한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생존은 단지 기술의 습득으로 배부르게 먹기 위함이 아니다. 굶주림을 넘어선 다음의 인간의 인문적 질문을 필요로 한다. 묻지 않는다는 건 궁금하지 않다는 건데 질문의 빈곤은 생각의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을 쫓아 사는 건 진부한 생이다. 물음도 모험도 없는 삶은 평면적인 동물의 삶과 비슷하다. 인문의 열풍이 부는 세태에는 인문 정신을 교양 치레쯤으로 여기는 풍조도 섞여 있다. 배부른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인 격이다. 액세서리처럼 두른 자신만의 교양에선 썩은 냄새가 풍긴다.

지구 상에서 인간 삶의 조건은 평등하지 않다. 하여 '보편적'이란 기준도 위험한 발상이다. 기준에서 넘어서거나 모자란다는 것의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야만, 비문명인 등의 인식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것의 확장은 계몽, 계도를 필요로 한다고 믿은 건 그들이다. 선교를 앞세워 제국주의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했다. 자신의 기준이 정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적 존엄과 상식에 피지배 민족은 포함되지 않았다. 대동아공영을 누가 바라기라도 했단 말인가. 군국주의 일본은 동양 동양평화를 앞세워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고 학살했다. 잉카 제국을 점령, 무참히 학살한 에스파냐의 피사로는 순진한 원주민과 왕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한다.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은 그 후 에스파냐가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원주민들이 유일신의 종교인 기독교의 선교를 바랐던가. 우리를 지배해 달라고 대포와 총을 든 침략자에게 애원한 적이 있던가. 이렇듯 지구의 문명은 정복과 피의 지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매듭법을 말하려다 생각이 천지사방으로 뻗쳤다. 매듭은 일상에 소용되는 간단한 방식이다. 그러나 매듭으로 시작한 배움은 일상에서 소용의 범위를 떠나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상상력의 확장과 깊이는 창의력에서 완성된다. 매듭 연습은 당분간 생각날 때마다 되풀이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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