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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4

by 소인

울릉도④

어차피 각오한 고생.
오백여 명의 관광객을 선착장에 풀어 놓으니 때아닌 단풍놀이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입도객이 가이드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체인에 오일 칠하고 천천히 선착장을 빠져나갔다. 울릉도 라이딩을 더러 한다고 들었는데 그 많은 놀이꾼 중 자전거 끌고 온 놈은 나 하나다.

소금기 진한 바람맞으며 도동 방향으로 달렸다. 시계 반대방향이다. 열한 시. 점심 전이지만 후포항 편의점에서 너무 가볍게 때운 터라 배가 훌빈하다. 좁은 비탈의 지형이라 울릉도는 번번한 가로수보다 길가의 절로 자란 풀이나 나무가 그대로다. 가풀막 허위단심 오르다 산딸기를 만났다. 한창땐 지난 듯 시들어 보여도 맛보니 새초롬한 게 구쁜 맛이다. 그녀가 보았으면 퍼질러 앉아 배 채우자고 성화였을 거다.

이정표와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도를 가늠하며 길 가다 독도박물관과 섬 체험관을 놓쳤다. 나중엔 안용복 기념관도 지나쳤다. 알고 보니 지도상의 그것들은 새로 난 도로와 한참 떨어졌다. 바닷가 거나 중산간의 오르막이다. 첨 온 울릉도를 가쟁이만이라도 일별 하고 싶었다. 개관하고 난 다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순서 아닌가. 도동을 지나 저동에 닿으니 소란스러운 번화가 느낌이 났다. 정작 마주치니 배에서 흩어진 관광객 여기 다 모였다. 점심때니 배 채우고 돌아볼 모양이다. 그들은 관광을 왔고 나는 여행을 한다.

낯선 곳의 라이딩 팁 하나.
밥때가 되면 메뉴 가리지 말고 먹고 본다. 어물쩍대며 고르다 밥때를 놓치면 라이딩은 고난의 행군이 된다. 가파른 언덕 다음엔 급한 내리막이다. 인생도 그렇다. 양손에 힘을 잔뜩 주고 내려가니 디스크에서 고무 타는 내가 났다. 이러다 브레이크 파열로 골창에 처박히는 건 아닌가. 그럴 때마다 그늘에서 쉬었다. 쪽빛 바다 위에는 하얀 거품을 내며 고깃배가 오갔다.

선착장 관광안내소 아가씨가 일러준 대로 찾았더니 '비둘기 서식지'란 곳은 후박나무 가지에 엉성한 나무통이 덩그랗게 달려 있었다. 그래도 동네의 쉼터인 듯 수백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후박나무 세 그루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쪽에 선 곰솔(海松)이 적당히 구색을 갖춘 훌륭한 장소였다. 아래엔 끈질진 파도가 시비하듯 툭툭 해안도로 옆구리를 건드렸다. 맞춤하지만 초저녁의 동네란 오가는 눈이 많은 법.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었다. 말이 일주도로지 그냥 45km 아니었다.

불뚝 솟은 화산섬은 사람의 길을 순순히 내주지 않았다. 바람과 파도에 시달린 섬의 도로는 곳곳에 상처를 안고 버틴다. 원래 길은 생긴 대로 산을 넘고 물을 돌아 열린 거였는데 요즘은 함부로 바위를 뚫거나 산을 깎아 길을 낸다. 사람의 쓸모에 맞게 바꾸는 거다. 탄탄대로. 빠르게 효율을 강조하는 가치가 외려 사람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드는 꼴이다. 빨리 가서 뭐 하자는 건가.

섬을 일주하며 본 것은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제주도처럼 땅값의 광풍에 들뜨거나 하지는 않아 보인다. 동해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울릉도의 모습은 쌍봉낙타의 부드러운 혹을 닮았다. 가도 가도 가게가 드물고 섬을 닮은 사람들이 바다와 함께 자고 움직인다. 길을 묻거나 인사를 나눠도 예전 질박한 심성의 조선 시대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다. 나물을 키우고 고기를 잡고 뭍으로 나간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는 소의 잔등처럼 넉넉한 인심을 닮았다. 다는 아니지만. 사람의 바탕은 어울림의 가락인데 세상이 망쳐버렸다. 더러운 정치가 역하고 토악질 나는 비교와 상처의 트라우마. 감추고 가린 역사의 진실을 묻어버린 가납사니들의 농간에 망둥이처럼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질탕에서 허우적대는 삶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장님이 되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의 상록교목이다.
중부지방 사람들이 후박나무라고 부르는 수종은 목련과의 낙엽교목이다. 후박나무는 우리나라의 남부가 원산지고 일본목련은 일본이 원산지다. 둘 다 지름이 일 미터나 자랄 정도로 거대한 나무다. 높이도 이십 미터까지 자라 녹음 수종으론 으뜸이다. 후박나무의 '후박(厚朴)'은 인정이 두텁고 거짓이 없다는 뜻인데 울릉도서 후박나무의 후박한 인심 덕을 보는 중이다.

피로와 술기운에 잠들었는데 텐트가 쏠리는 느낌이 들어 잠 깼다. 밤이 되니 파도는 한결 세졌다. 심술궂은 시누이가 새벽동자 지으라고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하늘과 바다가 어둠으로 한 몸이 된 칠흑 속에 굳건한 믿음처럼 고깃배의 불빛이 보였다. 망망한 어둠 속에 흔들리는 배엔 고단한 어부의 꿈이 자라고 있을까. 그물처럼 그의 삶도 부푼다면 검푸른 바다와 씨름하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도 쿠바의 산티아고 노인처럼 인생은 그것으로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소년 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삶은 외롭지 않으리. 텐트 밖에 머리만 내놓고 있으니 바람에 떨어진 후박나무 이파리가 얼굴을 할퀸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에 익숙한 섬사람들은 곤한 단잠 중이다. 어설픈 이방인 낯선 동네 한가운데 들어와 잠 설치는 중이고.

울릉도⑤

나리분지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배낭과 자전거를 펜션에 맡기고 나오니 홋홋하다. 바람 시원하다. 사동리 후박나무 아래 파도소리 들으며 잠 설치다 다섯 시에 일어났다. 식당에 핸드폰 충전을 맡기고 짐을 꾸렸다. 섬 일주를 어제 마쳤으니 하루가 남아 오늘은 내륙을 가볼 생각인데 짐이 걸렸다. 부근 펜션은 주말이라 예약 만실이란다. 펜션 주인과 얘기 도중 옥상을 쓰면 어떻겠냔 제안. 물 전기 나오니 됐다. 싸게 얻었다. 우선 손님이 안 든 방에서 씻어도 좋단다. 빨래하고 샤워하니 사람 같다.

어제 기신기신 비지땀 흘리며 왔던 길을 차 타고 보는 느낌은 새로웠다. 나리분지는 텔레비전서 보던 대로 세숫대야 같이 생겼다. 산마늘 밭에는 산마늘 꽃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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