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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5

by 소인

울릉도⑥

울릉도는 버스노선이 잘 짜여 있다. 버스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도 되고, 정한 목적지마다 연결되는 버스 시간표로 일정을 세워도 된다. 잠깐씩 버스를 기다리며 고즈넉한 섬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여행의 재미다. 관광회사의 가이드나 렌터카도 한 방법이나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대중교통을 따라오지 못한다. 자전거로 속속들이 찾는 건 체력의 소모가 만만치 않다. 자전거로는 해안선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걸로 충분하다. 내륙은 바로 급경사의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이 편리하다. 천 원만 내고도 아찔한 가풀막을 오르내리는 쾌감은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어제 배에서 내리기 전 중년 사내가 중얼댔다. '뺏기기 전에 함 봐야지' 독도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묵지근하게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생각이 없기로 농 같잖은 말을 뱉다니. 국가나 민족을 들먹여 영토 주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살았던 사람들이 삶을 버텨내기 위해 사나운 물살을 헤쳤던 장소다. 공간과 시간의 실존이 엄연한 사실을 우겨대는 일본이야말로 영토 야망의 제국주의 탐욕을 씻어내지 못한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후대들에게 불의한 충성을 강요하는 행위는 반평화 반인간적이다.

안용복기념관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호로로록 꾀꼬리 소리 쭈뼛대는 산새 소리 요란하다. 적막감을 못 견디겠다는 듯 눈부신 유월의 햇볕이 텅 빈 기념관 광장을 쏘아댄다. 섬조릿대 너머 죽도가 보인다. 섬은 정오의 무료에 익숙한 듯 잔잔한 수면에 누워 나른하다. 관광은 말 그대로 스치며 눈요기를 즐기는 행위다. 섬 특유의 맛집을 돌며 색다른 미각을 즐기는 것도 살아 빠뜨릴 수 없는 도락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거를 일별이라도 톺아보거나 사고하지 않는다면 삶의 유의미는 멀어진다. 삶은 욕망이 덧칠해져 그저 그렇게 굴러온 게 아니다.

대만의 관광코스에서 대북 박물관 견학이 사라졌단다. 대륙의 공산당에게 쫓겨난 장제스가 엄청난 양의 국보와 보물을 섬으로 날랐다. 순차적으로 몇 년에 걸쳐 전시해도 다 못 볼만큼의 규모다. 대륙은 땅을 치며 눈물을 삼켰고 대만은 떡하니 박물관을 지어 선대의 문화유산을 뽐낸다. 도둑질한 양심이고 문화다. 그것을 보려고 대륙 사람들이 대만을 방문한다.

정시에 버스가 돌아왔다.
아까 태워준 기사가 알은체한다. 버스 옆구리가 결릴 정도의 급경사를 내려와 관음도가 보이는 정류장에 내렸다. 버스는 천부 쪽으로 사라지고 도동 가는 차를 기다려야 한다. 어제 자전거 타고 왔을 때 정류장에서 낮잠 자던 백구는 보이지 않고 해안 절벽을 선회하는 괭이갈매기 소리가 요란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도보로 여행하면 차를 타고 순식간에 스치던 사물과 풍경이 들여다보인다. 이른바 찬찬히 관찰하면 대상의 속살이 나타난단 얘기다. 관찰이 사유를 통해 관념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면 통찰에 가까워진다. 통찰은 수직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수평적 사고의 확장이다. 인식의 확장인 게다. 많이 안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식의 틀을 자꾸 깨어야 일반적 인식을 넘어설 수 있다. 풍경은 눈을 통해 보는 대상에서 벗어나 호흡을 함께하는 대자의 관계로 진입한다. 존재의 허무와 겸허가 들어서는 순간이다. 안다는 것에서 멈추면 삶은 진부하고 구태의연해진다. 과거의 지식과 정보는 더 이상 삶을 삶이 되게 부추기지 못한다.

배차시간표는 한 시간 넘게 기다리란다. 슬슬 배는 고파오고 해서 호박만 한 몽돌이 깔린 바닷가를 어슬렁댔다. 방파제 마당에 봉고차 한 대가 있다. 낚시를 하는 듯해 구경하러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는 라면을 끓이는 중이고 남자는 테트라포트 사이에 낚시를 넣고 입질을 기다린다. 물 바닥이 투명하게 찰랑거렸다. 그들만의 풍경 속으로 끼어든다. 낚시라면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키기 충분했다. 그다지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낚시를 좋아했던 아버지 덕에 중학교 이학년 때는 내 인터뷰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고 가족이 낚시 전문잡지의 달력에 나왔다. 다음날 아침 수업시간에 모 선생이 날 호명해서 놀랐는데 조간신문을 보는 어른들의 빠른 정보 전달력에 눈뜬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분별력의 지식과 정보에 민감하지만. 암튼 광고회사 시절엔 신문협회에 찾아가 그때 기사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진 못했다. 뭐가 대수랴.

남자에게 조과(釣果)를 물었다. 신통찮다고 한다. 그저 유람 삼아 나왔단다. 경북 칠곡에 사는데 자식들의 팔순 잔치를 마다하고 봉고차를 캠핑카로 꾸며 팔도 유람이란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건 건강 탓도 있지만 나도 나이 들어간단 얘기다. 즐거운 여행 하시라고 덕담을 떡밥처럼 던지고 돌아서는데 소주 한잔? 하고 발길을 잡는다. 에고... 허기 중에 듣던 하늘의 음성이었다. 짐짓 사양하는 척 겸손으로 무장했지만 바로 무장해제되고 만다. 시푸른 바다와 관음도를 바라보며 술병을 땄다.

염치 불고하고 빵과 소주를 몇 순배 얻어마셨다. 빈속이 금세 불콰해지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외는 말을 아꼈지만 따스함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 하나라도 내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통에 눈물이 날 뻔한 한낮의 대작(對酌)이었다. 화산암의 숭숭 뚫린 절벽으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갔다. 흙내를 맡은 해국(海菊)이며 섬 지호, 섬조릿대가 하하 웃으며 잘게 흔들렸다. 어른과 조력(釣歷)을 나누고 과하거나 무례하지 않게 일신의 내력 얼비치고 손 흔들고 헤어졌다. 물론 폰에 지닌 두 자짜리 잉어도 자랑하듯 보여드리고. 잉어야, 그땐 미안했다. 나도 덜 깬 잼병의 사람이라고...

울릉도의 강남이란 도동항에서 물회에 소주를 마셨다. 기분 좋게 오른 낮술로 내릴 곳을 지나쳐 걷는 바닷길은 흡족했다. 다시 못 올 섬, 울릉도가 날 넉넉하게 품어줘 황감하다. 고마우이더, 울릉의 풍경들이여.

펜션 옥상에 텐트를 쳤다.
여긴 모기도 파리도 만나기 힘든 여자처럼 드물다. 육지와 떨어지고 바람이 드센 탓인가 보다. 손빨래하고 라면 끓여 소주 일 병. 난간에 기대 짭조름한 바람맞는데 저녁 밥때인지 괭이갈매기가 요란스레 식판을 두드린다. 어둠이 바다와 한몸되면 고깃배도 집어등 달고 꿈을 밝힐 거다. 유혹의 빛이언정!

울릉도⑦

새벽이 열린다.
희부윰한 빛이 동녘에 나타난다. 뾰족한 화산암 기둥이 거인처럼 우뚝 선다. 해를 진 거인은 지구를 돌아왔다. 밤새 졸음과 미망을 거둔 고깃배가 집어등을 끌고 움직인다. 부지깽이나물 밭 위로 곰솔 숲에선 산새 깃 터는 소리, 산꿩, 갈매기 뒤채는 소리 날카롭게 섞인다. 바다는 순한 물살로 섬의 발목을 적시며 애무한다. 간밤 늦도록 왁자하게 놀던 관광객들 곤한 꿈길 고요하다.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배는 깃발을 단다. 고기잡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쿠바의 산티아고 노인처럼 몇 날 며칠을 파도와 싸우다 빈 그물로 돌아와도 사내의 무사귀환은 가족에겐 하늘의 소식과 맞먹는 거였다. 모두들 풍어의 삶을 꿈꾼다. 하지만 어떠랴. 텅 빈 어창(魚艙)이어도 그리운 사람 함께 숨 쉬는 오늘 더욱 중하지 아니한가...

얼굴 씻는데 울릉도의 자국이 버석하게 묻어난다. 섬에서의 이틀 밤 잘 지냈다. 바다와 파도와 바람이 몸에 스몄다. 우렁한 눈망울 가진 소의 잔등 같은 섬이여, 내내 안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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