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여행
초여름 되자 햇살 뜨겁다. 아침저녁으로 선득해도 낮에 마당에 서면 쏟아지는 햇볕 아뜩하다. 뼘뙈기 화단에 꽃보다 채소가 우세하다. 텃밭 접은 후 몇 걸음 나가 풋고추 따고 상추 깻잎으로 쌈 싸던 기억이 아쉽다. 식은 밥덩이 찬물 말아 된장만 찍어도 거뜬한 여름날 밥상이었는데.
전부터 맘에 둔 남도 여행 가기로 했다.
이번엔 지리산을 돌아 남해 짠물에 손 담글진 모르겠다. 여행이 출장이 되어선 안되는데 나이 드니 자꾸 실없이 계획만 세운다. 그러다 허문다. 쌀 사고 라면도 샀다. 한밤중 소나기 염려해 텐트 플라이도 챙겼다. 남도 땡볕에 자전거 통째 타버릴지 모르겠다. 툭툭 힘줄 불거질 시절 아니다. 처진 뱃살, 핏기 잃은 볼때기, 조락한 정신... 그래도 맘은 설렌다.
세지 않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부동 지나면서 끄느름한 하늘에 비라니 시원해서 존데 남쪽으로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행문은 현장에서 설익은 밥처럼 쓰기보다 곰삭힌 젓갈처럼 집에 돌아가 쓰기로 한다. 보고 느끼는 것들이 가슴에 차오르기만 할 뿐, 걸러지고 정제되는 건 나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건,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깨우침이란 우리의 구체적 현실 안에서 더욱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모르면 오늘이나 내일, 기껏 이틀을 사는 하루살이 삶에 다름없다. 하루살이에게 미래는 없다.
눈 뭉쳐 소금 찍어 먹던 빨치산 봄 오고 숲 우거져도 배를 곯았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은 그들. 친일 반민족 세력과 악덕 지주 없는 평등한 세상 바라며 인민해방 위한 전쟁에 목숨 바친 그들. 기름 낀 배 쓰다듬으며 지리산 개울가 해거름 맞는데 생각 없는 저녁 물고기 은빛으로 공중에 솟구친다.
휘이이 휘이이 밤새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일찍 저녁 먹고 누웠다. 개구리 소리, 어두워지고부터 어디선가 나타나 일정한 간격으로 울어대는 호랑지빠귀, 여울을 지나며 남쪽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개울 건너 산의 실루엣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나타났다. 중년 여인의 치마폭처럼 포근하게 느껴진다.
산이 가까워서 물은 맑고 투명했다. 쌀을 씻고 안치는 물은 가지고 온 물로 할까 하다 그대로 개울물을 떠다 밥을 지었을 정도다. 마시진 않았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식당, 펜션이 다닥다닥 붙었다.
열 시쯤 되어서 어둠 속에 웅성대며 한떼의 사람들이 개울가로 내려왔다. 그들은 물 바닥에 불빛을 담그며 밤 고동을 찾았다. 어제 환한 초저녁에도 두 명의 여자가 개울에서 기웃거리다 갔다. 남자는 일행에게 들뜬 목소리로 다슬기 잡은 내력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들의 불빛이 아래쪽으로 사라지니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밤에 다니며 고동을 잡을 수 있는 입장이 평화로워 보인다.
전쟁이 없고 이념으로 갈라서 대립하는 싸움이 없다면 농부는 농사짓고 노동자는 땀 흘리며 살 거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현실에도 생존의 불안과 공포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좀 더 나은 안위와 위치를 찾아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경쟁한다. 누구나 별반 차이가 없는 획일화된 삶의 목표를 정한다. 무한 경쟁은 생계를 해결할진 몰라도 삶의 질은 높이지 못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망가진다.
새벽 한기에 눈을 떴다.
텐트는 이슬에 흠뻑 젖었다. 섬진강으로 가기 전 말려야겠다. 낼은 플라이를 쳐야겠다. 앞산의 꼭대기는 산안개에 가려졌다. 네 시다. 호랑지빠귀도 지쳤는지 조용하다. 물소리만 들리더니 잠 설치는 뻐꾸기 소리 들린다. 밤고기가 튀는지 불규칙한 물소리가 난다. 차가 간간이 지날 때마다 건너편 숲의 종아리가 환하게 드러났다 어둠에 묻혔다.
희붐하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아침은 새들이 먼저 연다. 물새 소리가 바빠진다. 물소리가 점점 가늘어진다.
시천천에서 목욕하고 밥 지어먹으며 하룻밤을 잘 지냈다. 개울물 소리에 섞여 인민해방을 위해 고투하던 빨치산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고장은 남명 조식의 입김이 서려 있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같은 해(1501, 연산군(7)에 태어나 두 살 더 살았다. 초시 향시엔 붙었으나 이후 과거에 불합격한 뒤론 수차례 벼슬 천거를 마다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선생은 감정의 기보다 이성의 리를 중시했다. 자아의 궁구하며 무실역행을 가치로 두었다. 어쩌면 양명학과 실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임진왜란 때는 후학인 곽재우를 비롯하여 서부 영남이 의병 일으키는 데 지주 역할을 했다.
안개에 가린 지리산 봉우리를 떠나 함양으로 가는 중이다. 함양의 상림은 신라 때 천재 학자인 최치원이 함양 태수 시절 홍수예방을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다.
함양의 상림은 전형적인 온대 남부의 낙엽활엽수림이다. 신라 말기 고운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홍수 예방을 위해 만든 인공 숲이다. 이른 아침 산책하는 주민들이 많다. 이팝나무 가지를 건너뛰며 떼까치가 극성스레 떠든다. 안개 걷히면 오늘도 더울 듯한데 공기는 더없이 쾌적하다.
춘향의 고장 남원.
사십 년만이다. 춘향이는 사랑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을 성취한 인물이다. 역사는 시대적 조건을 읽어야 한다. 누구나 춘향이처럼 될 수는 없다. 혁명가 허균처럼 시대를 앞서간 사상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오항녕 교수는 역사는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의 의지, 그리고 우연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지리산의 빨치산도 소급하면 임진왜란, 동학혁명, 구한말 항일 의병, 제주도 4•3과 여순 사태와 한국전쟁의 맥락이 있다. 탐관오리와 국가의 폭정에 저항한 민중의 피가 오늘의 현실에 어김없이 흐른단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만의 현실에 몰입하는 사람은 눈앞의 역사만 볼뿐이다.
김주열(1944~1960)
국부를 자처하며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전시작전권까지 넘겨준 노망난 이승만의 독재는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원은 김주열 열사의 출생지다. 아들의 죽음에 '나라가 민주 국가가 된다면 아들 셋이라도 가져가라'던 어미의 절규는 당시 민중의 분노를 짐작케 한다. 그래서일까. 김 열사의 묘소는 세 군데다. 열사를 키우고 죽음을 양산하는 국가는 나라가 아니다.
구례 운조루는 조선 영조(52, 1776년) 때 삼부 수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은 양반 가옥이다.
운조루는 택호인데, 도연명의 귀거래사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雲無心以出抽
鳥倦飛而知還
구름은 무심히 산 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오래전부터 뒤주에 쓴 '타인 능해(他人能解)'를 보고 싶었다. 쌀 두 가마니 들어가는 뒤주에 쌀을 담아 흉년이나 기근에 굶주린 사람이 퍼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매천 황현(1855~1910)
운이 좋았다.
섬진강은 하동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졌는데 은빛 모래가 가루처럼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진 매실나무의 물결이 강 따라 온화한 마을을 품었다. 관광지로 꾸며진 피아골 계곡, 화개장터를 지나 서울 광고회사 시절의 후배를 광양에서 보기로 했다. 흑산도 갈 때 잠깐 보았으니 십사 년 만이다. 저녁때 술 취했겠거니 생각하고 일찍 내려간 김에 광양 역사박물관에 들렀는데 매천 선생의 생가터가 광양에 있단다.
매천 선생은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지식인의 앙가주망을 한탄하며 음독 자결한 강직한 선비다. 매천은 구한말의 난세 속에서 각처의 소식을 취합하여 매천야록을 남겼다. 한말 삼재(韓末 三才)라 불렸던 문장가 이건창, 김택영과도 교분이 깊었던 매천은 나라의 불운을 참을 수 없었던 거다. 그가 동학을 비판적으로 본 건 당시의 양반계급의 시각으로 어쩔 수 없었던 한계이기는 하나, 죽음으로 저항한 시대정신은 되새길 만하다.
한반도의 가운데로 내려가 남쪽 끄트머리 돌아 다녀왔다.
봉화에서 출발한 여정이었다. 긴 거리는 차로, 정한 고장에서 자전거로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차만 타고 다니게 되었다. 어디나 쭉쭉 뚫린 길은 차를 부르고 있었다. 운전 중의 긴장은 사색을 방해한다. 굽은 길이나 갈래길에서 생각의 맥락은 끊어지고 앞만 바라본다. 멈추고 땀 씻으며 주변을 천천히 돌아볼 틈이 사라진다.
역사를 보는 시선도 그러하다.
사관이나 학자의 입장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사는 일체의 주의나 사상, 이념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접근해야 한다. 만약 좌우의 이념이나 정치 경제적인 관점을 고집하면 역사의 상황이란 건 치우친 생각을 좇게 마련이다. 보편적 통념이란 말도 자기의 가치관에 따른 편리한 관점일 뿐이다. 결국 상식이란 것도 그렇게 되면 결코 보편적이지 않게 된다. 일테면 성소수자의 생각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성애가 정상처럼 굳은 생각인데, 동성애나 양성애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비정상적, 반인간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건 양성평등이 아니라 그건 바탕이고 결국엔 인간 평등의 공정한 사회를 말함이다.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이름 지어진 순간부터 폭력은 은폐되고 조장된다. 빨갱이나 종북좌빨로 상대편의 입장을 뭉개버리는 극우의 무개념은 그래서 기막히게도 세대를 넘어서 훌륭한 무기가 되는 세상이다.
공안 검사를 지낸 총리 출신의 야당 대표가 백선엽을 만났다. 대통령이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훈장 추서를 거론한 다음의 일이다.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부위원장을 지내다 숙청된 약산은 해방 정국의 혼란한 남한에서 버텼다면 여운형이나 김구처럼 암살당했을 거다. 아니면 조봉암처럼 처형되었을 거다. 그는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때 북한에 남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의 옌안 파 숙청 때 제거되었다. 백선엽은 만주 사관학교를 나와 간도 특설대에서 이 년 반 동안 독립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짓밟은 인물이다. 그런 자에게 이전 정권은 명예 원수 추대를 추진했다. 광복회의 반발로 무산되었지만 핵심 친일파조차 단죄하지 못하고 흘러온 우리의 모습이다. 백선엽에게 해방이나 한국전쟁은 호기로 작용한 변신의 상황일 뿐이었다.
박정희나 백선엽이나 불운한 시대에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열정을 바쳤다. 그러나 개인의 가치와 세계의 가치가 충돌하는 시점에서 영달과 안위를 택하는 건 전형적 기회주의자의 형태다. 이광수는 법정에서 자신은 천황의 신민이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기회주의자는 시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이전의 가치관은 떨어진 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는 인간형이다. 민족과 인민 대중도 그에게는 신분상승의 발판이지 자신의 삶과 함께 아우르는 가슴 뜨거운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확실히 구별되는 건 역사나 시대인식의 부재다. 그런 부류는 눈앞의 현실만 보기 때문에 애초 역사인식이란 자신의 이익 앞에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기회주의자의 냉철한 분석일지도 모른다.
수치
2013년 광주의 망월동 묘역을 방문한 아웅산 수치가 기념식수를 하고 떠났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에 대한 반목의 역사는 골이 깊다. 제국주의 영국이 소수족인 로힝야족을 이주시켜 지배계급으로 만들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차대전 후 독립한 미얀마는 이번엔 로힝야족의 인종 청소에 나섰다. 미얀마의 민주화와 독재 저항의 상징이었던 수치는 국가 자문이 된 이후 로힝야족 사태를 외면하거나 정부의 폭력을 두둔했다. 인권기구인 국제앰네스티는 그녀에게 준 인권 대사상을 박탈했다. 민주화의 영웅이었던 수치의 다른 얼굴인가. 이념과 민족을 앞세워 인간을 저울질한다는 건 위험하다. 인권은 이념을 초월한 생명 존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