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여행
제아무리 신념에 찬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 그것은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행이 낯선 이방인(침입자)의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것을 찾으러 떠나는 행위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굳이 그것을 분석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다. 내가 태어날 때 나의 조건에 누군가 전망을 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은 것처럼 여행은 부딪치며 느끼는 것이다. 오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손 흔들고 떠나면 그만이다. 어쩌면 작별 인사도 없이 인생도 불 켠 듯 마감될지 모른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은 맞는 말일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집은 관습의 구태의연한 도덕의 울타리이면서 안락과 위험으로부터의 해방구다. 모험을 마다하는 사람은 여행을 기피하지만 뭔가를 얻어내지 못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섬바디의 정체성은 그의 불안과 공포를 상쇄시켜 생존을 유지케 한다. 여행을 떠난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가 된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은 나를 이방인으로 바라본다. 구불텅한 길, 바람, 쏟아지는 햇볕, 사람들, 산과 들, 푸르스름한 새벽과 시뻘건 황혼, 밤새의 울음소리, 끝없는 어둠과 꼬리를 무는 사색...... 모든 것들이 환대가 아닌 적대적인 관심이라면 여행자의 지위는 위태롭다. 차라리 '예의 바른 무관심'이 낫다. 섬바디라고 존재가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타인인 노바디를 경계하고 배척한다. 그들의 공동체에 편입되기 위해선 나를 숙이는 게 우선이다. 때로 강한 사람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들의 공동체를 부정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다.
추구하는 대상은 섬바디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현대는 몰개성이 몰가치를 낳았다.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가 나를 엄습한다. 삶의 목표는 제도 교육과 부모와 사회에서 또박또박 일러준다.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낙오되거나 처지면 죽음과도 같은 패배의 낙인을 피할 수 없다. 옥죄이는 현실은 고통스럽고 편안하다. 함부로 내동댕이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자유는 처절한 실존이며 고독한 투쟁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구속의 안락과 함께 도식적인 삶은 사회로부터 보장받지만 그때부터 감시와 기만, 허위와 손잡아야 한다. 칼을 꽃으로 내미는 무대의 훌륭한 마술사가 되기도 한다. 불확실한
의식의 확대를 저어하는 상황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결국 개체에 대한 불안성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열 살 때 처음으로 여행을 했다.
가출이었다.
서울역에서 도둑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은 전남 곡성이었다. 가난에 찌든 집을 일으키고자 오십 원을 들고 감행한 가출이었다. 국수 사러 가다 세상 밖으로 나갔다. 열흘 만에 거지꼴로 돌아와 형한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졌다. 방학 끝나고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상을 주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글짓기 상이었다. 동무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뻘쭘한 나는 착한 어린이가 되기로 했다. 그때부터 줄곧 1,2등을 다퉜고 축구 잘하는 학교에서 전교 응원단장을 했다. 소풍 가면 선생과 친구들은 나를 찾았고 난 유행가를 폼나게 불러젖혔다. 그러나 늘 맘은 콩밭에 있었다.
고등학교 때 두 번째 가출을 했다.
철학책을 잔뜩 넣은 가방을 들고 산에서 보름을 버티다 하산했다. 주머니에 칼을 꽂고 산을 넘어 해인사에 도착했다. 석탄일의 하얀 코끼리를 보았다. 신도들은 연등을 단 절마당 그늘에서 통닭을 뜯었다. 고등학교를 사 년 만에 졸업하고 대학의 국문과에 들어가기까지 방황은 계속되었다.
머리 굵어진 이후 역마살은 퉁퉁 불어 터졌다.
남도를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녔다. 고깃배를 타고 고물 가위 쩔렁대며 바닷가 마을을 돌아다녔다. 신축 중인 건물에서 사전을 베개 삼아 잤다. 춥고 배고팠다. 나를 정의할 수 없이 방황했다.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유치하고 미숙한 자의식은 세상과 불화했고 빠져나오려고 할수록 점점 깊이 갈앉았다. 난 세상에 떠다니는 가랑잎이었다.
수목 관리하던 땅이 팔리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직했다.
십오 년의 노햇마을을 청산하고 아내의 고향인 내륙지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집을 떠날 궁리로 들썩인다. 여행의 종착지는 집으로의 귀환이다. 여행 중 사고를 만나거나 여행에 물리면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대의 집도 불안하다. 도처에 땅이 흔들린다. 균열은 막기 어렵다. 맛도 냄새도 없는 관계가 버팀목이 된다. 마사이족은 가축을 데리고 물과 풀을 찾아 평생 초원을 떠돈다. 정주할 거처가 없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삶을 마감한다. 여행은 낯섬과의 충돌이고 타인과의 만남이며 스밈이다. 추구하는 무엇을 만날 수도 성찰을 얻을 수도 빈손일 수도 있다. 나란 존재가 목적의식적으로 태어났다는 건 순전히 문화 이후의 개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살아가는 이상 사회적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짐을 쌌다.
태양광 충전기도 주문했다. 스무 살 무렵 포항에서 제천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다. 영천 대구 추풍령을 지나 남포 터지는 영월까지 가는 동안 밥을 얻어먹고 삯일을 했다. 강에서 마른 가지를 모아 불 피워 국수를 삶았다. 흐르는 강물에 씻어 소금에 먹어도 꿀맛이었다. 아무리 걷고 달려도 가슴은 허전했고 머리는 뜨거웠다. 홀로 선다는 것은 난해하고도 피폐했다. 사북탄광에서 취업을 거절당하고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황막한 사막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휴대폰, 버너, 코펠이 있고 얼마간 경비가 준비되어 있다.
배낭을 꾸리니 무게가 상당하다.
필요한 것만 넣었는데 십오 키로가 넘는다. 십 대 이십 대와는 체력도 추구하는 것도 달라졌다. 이번 여행은 랜덤이다. 남쪽으로 방향은 잡았지만 일정은 없다. 가다 지치면 쉬고 물 만나면 씻을 생각이다. 이슬 젖어 뭇별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무수한 상념 유성처럼 꼬리 물고 이어질 거다. 살아 만난 사람, 먼저 떠난 사람, 여적지 인연의 고통스러운 끈을 쥐고 흔들리는 사람들...... 오고 가고 다시 나가다 맘 둘 곳 생기면 그대로 머물 수도.
고운사
똑똑 빗소리 들으며 텐트에 누웠다. 저녁밥 끓여 먹는 중에 비가 시작했다. 밥 위에 국에 머리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안동 아래 북의성의 고운사 절 아래서 하룻밤 묵기로 한다.
아침 대충 먹고 장비 챙겨 시험 라이딩한다는 게 내처 내려왔다. 내일 새벽이나 지금 당장이나 무슨 의미란 말인가.
가도 가도 가게는커녕 인가도 드문 시골길을 달리다 죽는 줄 알았다. 팥죽 같은 땀을 푹푹 쏟으니 체력은 바닥나고 눈앞이 캄캄한데 하품이 나오다니... 천신만고 예고개 기사식당서 청국장을 시켰는데 밥이 넘어가지 않아 물 말아 넘겼다. 페트병 2L를 들이켜고 한숨 돌리니 살 것 같다. 배낭을 짐받이에 묶었다. 한결 몸이 가벼웠다.
안동 지나 북의성에서 고운사 길로 들어섰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인데 고운 최치원하고도 인연이 깊다. 그래서 고운사다. 절 가는 길은 가로공원처럼 꾸몄다. 일주문 전까지 민가는 없고 일주문 지나 절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이 있는데 고요하다.
플라이 가져오길 잘했다.
비는 세염없이 모든 걸 적신다. 요양원 앞 소나무 사이 수도가 있어 물을 쓸 수 있었다. 저녁 먹고 밤 숲길 달려 씻고 오기도 했다.
절 아랫마을의 정자서 할머니들 만난 것밖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볕에 익은 몸이 설삶은 감자처럼 푸석한 느낌이다. 빗소리에 묻혀 뻐꾸기도 일찍 잠들었다. 나선 길 날씨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건 내 뜻이 아니다. 나의 삶이 끝내 허물 한 번 벗지 못하고 영원한 유충으로 살다 저물더라도 미욱한 존재 화엄 세계 근처도 못 가리라.
비는 새벽에 그쳤다.
산새 소리에 잠 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일제히 삐쭉삐쭉! 휘이익휘이익! 피유우 피유우! 까까깍! 요란하다. 비 안개에 잠긴 고운사 골짜기는 새들이 접수했다. 칡 이파리 위에 후드득 오줌 누고 물 타 커피를 마신다. 꿈을 꾸기도 했지만 잘 잤다. 잠 들기 전까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 얼굴이 유난히 하나둘 떠올랐다. 함께 공부하던 동생, 사고로 갑자기 세상 뜬 친구의 어머니, 남지나 바다서 그물 로프 감던 롤러에 다친 정 많은 갑판장, 묻지도 않고 내게 손 내밀던 따스한 사람들. 나는 예까지 무엇하러 왔을까. 지금 나의 마음 헤아리는 사람은 잠이 들었을까.
밤중에 한기가 들어 덮을 것을 당겼지만 산 중이라 춥진 않다. 짧은 라이딩복을 입고 잤다. 플라이를 걷어 자전거에 걸쳤다. 늦깬 뻐꾸기가 운다. 목청을 트려는지 참매미가 쓰르 하고 비벼댄다.
국 데워 밥 먹고 하루를 열어야겠다. 찌푸린 하늘은 저녁 굶은 시어미 모양 펼 생각을 안 한다. 눅진한 공기가 몸에 팔에 감겨든다.
- 수제비 만들기
멸치 대가리만도 못한
자존의 국물 끓어오르면
독한 이기로 치미는 허기
이기지 못해
물화된 욕망으로
캘리포니아산 초강력분 뭉기적뭉기적
주무른다
뚝뚝 람보의 표창 앞에 백기 흔들 듯
떨어지는 수제비
공습 뒤 불길한 유영으로
다시 떠오르고
탱크 몰고 온 서슬 퍼런 하얀 가루
굳센 악수 성조기 아래
맹방의 더운 식사
생각나
조선의 파 숭숭 썰어 띄우고
눈물겨운 의성(義城) 마늘 휘저어도
오늘의 주인공은 제국의
이슬 먹고 자란 수제비다
언젠가 *강나루 건너 밀밭길
쏘다닐 날 굳세게 꿈꾸며
이른 아침 일가기 전
뻐등뻐등 살아나는 하얀 살점
빛보다 빠른
제국주의의 단단한 덩어리
와락와락 깨문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 중
길
오래전 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로 충분했다. 지게꾼, 소 모는 농부, 산등 넘어 도부꾼. 시집가는 색시도 가맛길이면 충분했다. 길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삶을 이어갔다. 달구지, 우마차가 생기면서 길은 좀 더 넓어졌고 차가 생기면서 더 넓어졌다. 로마는 전차를 발명하며 영토를 넓혔다. 바퀴가 달린 마차를 위해 돌을 깔고 닦은 길은 지금도 멀쩡하다. 길은 이동의 수단이며 정복의 수단이며 영토 확장의 첨병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 중국을 삼키기 위해 철도를 깔았다. 예나 제나 군수품 보급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어릴 적 비포장길 양 켠에 하늘 찌르듯 섰던 미루나무는 길을 넓히면서 죄다 사라졌다. 바람 부는 한여름 반짝이며 물결치던 미루나무 이파리의 기억은 누구나 갖고 있을 거다.
군에서 예편한 아버지와 탈방거리는 이삿짐을 싣고 식구들은 길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사람이 다니던 길이 이젠 물류의 길이 되었다. 굽은 길을 펴고 산을 뚫고 강을 건너며 길은 사통팔달 쭉쭉 뻗어 났다. 길은 사람을 밀어내고 탈것만이 우대받게 되었다. 국도는 고속도로처럼 넓혔고 총알 같은 속도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람과 상품을 나르지만 물류가 대세다.
배산임수. 인간은 강과 개울을 끼고 마을을 형성했다. 돌아보니 영남과 전남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공장과 산업의 분위기도 영남이 압도적이다. 강원도 산 높고 골 깊은 시골길이 문득 그립다. 순박한 땅처럼 느껴진다. 공장과 농사, 축사와 넘치는 쓰레기로 물길과 땅은 더럽혀지고 찢겼다. 생태와 인간의 지속 가능한 생존은 점점 멀어지는데 현실의 추구는 그것들에 별무 관심이다.
자전거길은 똥내 나는 강가에 만들었지만 본심은 딴 데 가 있어 풀만 무성한 데가 많다. 강을 조지고 자전거 타라고? 째진 눈에 돈만 불 켜는 놈이었다. 본 데 없이 늙은 놈 재판에 유리한 결과를 위해 지금도 잔머리 굴린다. 그런 놈도 신에게 무릎 꿇고 기도한다. 인간의 신념과 확신은 욕망 앞에 소름 끼치게 견고하다.
길 넓어지며 사람도 자전거도 찬밥신세다. 자전거 타면 화물트럭이 바람을 날리며 일으키며 달리기가 두렵다. 아찔한 순간이 무시로 일어난다. 더구나 갓길엔 차에서 떨어진 날카로운 쇠붙이 뾰족한 돌이 구른다. 자칫 펑크로 이어진다. 전방의 바닥과 무서운 속도로 옆을 스치는 차를 피하려 핸들을 꽉 움켜쥐고 중심을 유지한다. 갓길이 좁으면 위험은 배가 된다. 갓길을 달릴 땐 조금의 방심이나 흔들림도 있어선 금물이다.
저물녘에 양파 수확한 밭에 자리를 폈다. 캐다 버린 양파가 해골처럼 뒹군다. 흙은 딱딱했는데 비 오면 진창이 되는 점토질이다. 논자리였나 보다. 라면 끓여 소주 한 병 비웠다. 텐트를 치고 눅눅한 플라이를 자전거에 걸쳐 말렸다. 이슬 내리면 도로 젖을 텐데. 꼬장한 성미다. 어두워지는데 옆 밭의 농부가 왔다. 비 올 거라며 낯선 이 마뜩잖은 눈치다. 내가 그의 하우스를 기웃댔기 때문이다. 하늘에선 쿠릉쿠릉 속 뒤집히는 소리 나더니 그예 비가 떨어진다. 오전엔 비 쫄딱 맞으며 달렸는데 조짐이 심상찮다. 단념도 빠를수록 좋다. 양파밭에서의 한둔을 접고 짐을 쌌다. 짐을 싸는 중에도 빗발은 굵어졌다. 배낭을 짐받이에 묶으니 사방이 캄캄한다. 조금만 늦었으면 불 켜고 애먹을 뻔했다. 옷이며 안경은 이미 부옇게 젖었다.
네비를 켜고 둑방길을 달렸다. 네비는 영천 찜질방을 가리키는데 사 차선으로 가란다. 자전거엔 전조등도 무엇도 없다. 길은 깜깜하고 라이딩복은 죄다 검은색. 상대 차에 눈에 뜨이기 어렵다. 길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소경이 따로 없다. 펑크가 나면 정말 대형 사고다. 그래도 달렸다. 입에서 술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정말 대책 없는 나다. 하나 어쩌랴 모텔이고 찜질방이고 잠자릴 구하는 게 우선. 차들은 씽씽 비켜가고 스쳐갔다. 십 키로 밤길을 달리니 영천 시 외곽이 보인다. 아파트 불빛이 물에 잠겨 보석 같다. 고흐의 그림이 생각났다.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빛나는 밤에 난 젖은 길 위에서 어디로 가나.
잘 잤다.
늦게 찾은 모텔에서 소주를 더 마시고 잤다. 이틀 만에 제대로 씻었다. 길에서 묻어온 먼지와 상념이 비누에 밀려 떨어졌다. 경산과 경주, 포항의 거리를 검색한다. 경산은 한국전쟁 때 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수직 갱도에 대구, 부산교도소의 수감자와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에 걸린 사람들과 단순 부역자, 노약자와 어린이를 무차별 학살했다. 유골 발굴은커녕 일부 찾아낸 해골을 컨테이너에 보관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역사는 일본에게 정말 더러운 것만 골라 배웠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 천황제를 부정한 공산주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을 두려워했다. 대륙 침략을 꿈꾸는 군부의 통제에 사상의 자유는 총칼로 죽여나갔다. 불순 불온한 분자를 색출한다며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반체제 인물을 잡아 가두고, 후에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으로 발전시켜 정권 유지의 도구로 삼았다. 간도 특설대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도운 조선인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을 학살했다. 견벽청야의 전술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 제주 4•3 때 서북청년회가 사람의 머리를 잘라 죽창에 꿰거나 관덕정 광장에 수박 덩어리처럼 쌓거나 월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 광주에서의 잔인하게 벌어진 군인들의 만행......
사회 일반이나 정치적으로도 잘못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되고 흐른다.
대구 방향의 경산행은 미룬다. 언제 올진 모르겠다. 요즘 하는 일이 마지막처럼 느껴진다. 경주는 신라의 도시. 중학교 때 수학여행 간 곳이다. 밤에 숙소 담을 넘어 막걸리 사다 친구들과 마셨다. 게다짝을 딸깍대며 일인들이 머물다 간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날 흐린데 비는 비치지 않는다. 아침 먹어야겠다.
영천에서 우거지 뼈해장국으로 아침 먹고 포항으로 간다.
어제 마신 술을 땀으로 푹푹 쏟으니 시원하다. 3군 사관학교 지나고 정몽주 생가도 지났다. 고려의 충절 정몽주와 조선의 개혁가 정도전. 정도전은 왕권을 분립하는 제도를 꿈꾸었다. 그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자인가.
길가는 온통 배롱나무다.
붉은색 보라색 꽃이 盛开다. 복숭아가 빨갛게 익어 매달렸고 자두도 맛이 드는 중이다.
포항 시내에서 길 잃어 한참 애먹었다.
우리나라의 시내는 어딜 봐도 똑같다. 같은 사람들 같은 차들이 달리고 지나간다. 나도 어지간히 촌놈이 된 모양. 조급증이 났다. 차량 네비와 자전거 네비를 등시에 켜고 헤맨 끝에 북쪽으로 길 잡았다.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가 오백 년 넘게 반촌 마을을 이어온 회재 이언적의 고향인 양동마을도 지나쳤다.
곰곰 생각하니 보고 안 보고의 의미보다 움직이며 생각하는 지금이 좋다. 사춘기 적 을유문고와 삼중당의 문고판 서적을 탐독했다. 세상 나가면 부딪치리라 맘먹었다. 실제로 부딪쳤으나 먹고 살기 급급했다. 밑바닥 삶에서 사색을 끌어올린다는 건 포시러운 공염불이었다.
애초 봉화서 포항까지 달리기로 했는데 여적지 달리고 싶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해안길 따라가다 칠포에 닿았다. 힘들고 더워서 땀보다 술이 땀으로 쏟아졌다. 해수욕장 번영회의 뽕짝을 들으며 둘러보니 텐트가 서넛 보인다. 기수지역에 그대로 몸 담가 문댔다. 개운하다. 옆 텐트에 애기 데리고 온 젊은 부부와 얘기 나눴다. 남자는 몇 해 전에 울릉도 라이딩 다녀왔단다. 순간 내 눈이 커지며 달변이 되었다. 어찌 반갑지 않으랴.
밥 끓이며 소주 마셨다.
나오고 밥 짓기가 만만찮다. 죄다 선 밥이다. 그래도 맛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 부니 간도 적당하다. 멀리서 번영회 지랄 맞은 뽕짝 성가셔도 라디오 음악 들으니 고즈넉하고 편안하다. 올밤엔 별 보며 그녈 불러낼까. 술 취하는 중이다.
내륙으로
칠포 월포의 해안도로를 달렸다.
새벽에 밭에 나와 일하는 노인의 종아리에 이슬 흠뻑 젖었다. 영덕을 향해 간다. 태백산맥의 허리를 넘어야 한다. 길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지만 인생은 꼭 그렇진 않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의 한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상황을 살피기 어렵다. 떨어져야 보인다. 간밤 소주 두 병이라니... 아침부터 흘린 땀이 죄다 술이다. 올부턴 삼가야겠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차대전 때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 시내를 자전거를 타고 누볐다. 자전거는 그녀를 독일군의 날카로운 감시에도 날라주었다. 그녀는 자전거로 몸과 사유의 영토를 넓혀갔다.
우중 캠프
밤새 빗소리 듣다 아침 먹고
젖은 짐 챙겨 철수 중이다.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마트에 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왁자한 소리가 났다. 서울 말씨다. 방학을 맞아 봉화 시골로 캠프 온 모양. 안경 쓴 아이가 많다. 각각으로 생긴 아이들의 목소리 들으니 기분이 좋다. 낯선 동네서 동무들과 어울려 떠드는 그들의 난만한 영혼에 덩달아 설레는 기분이다.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주 한 병 샀다. 올밤은 푹 자기로. 예약도서는 여적지 대출 중이다.
사박 오일.
이번 여행은 대강의 이동 경로만 염두에 둔 랜덤이었다. 영남지방은 성리학 이전 신라의 냄새가 짙은 지방이다. 전국 어디를 봐도 역사적 인물이 나지 않는 곳은 없다. 시간은 시대에 따라 사건을 만들고 인간의 삶은 부침하며 사라졌다. 이번 나들이는 순전히 몸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를 믿기로 했다. 체력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지의 염결만으로 헤쳐나갈 삶이란 가능한가. 우리는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경험하며 산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유토피아적 상상이나 국가가 인간이 행복한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신뢰의 토대는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인식은 사회적이며 개인 자체도 사회적 존재인 까닭이다.
리베카 솔닛은 '타인의 이야기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내 이야기의 일부를 비워내는 것. 그렇게 타인의 어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커진 경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라고 했다. 난 철저히 이방인의 자격으로 또는 침입자의 입장에서 그들 삶의 외피를 엿살폈다. 서로의 내면을 틈입하기엔 길 위의 대화는 급하고 짧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백 년이 되지 않은 현실에서 관습의 타성과 자본주의 학습은 비빔밥처럼 버무려졌다는 거다.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죽도록 일하고 일한다. 식민과 전쟁 이후의 숙명적 삶의 목표는 가난 탈출이었다. 산업화로 공동체가 무너지며 인간의 가치는 성공으로서의 부와 사회적 위치로 저울질한다. 심리학자 김태형이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병리 현상을 진단하고 인본적 사회주의를 역설한 건 그래서 맞다.
개인 소회 하나.
영양서 봉화 고개 내려오다 사망할 뻔했다. 브레이크. 자동차나 자전거나 브레이크가 생명이다. 구불텅한 내리막길 오백 미터를 무서운 가속도로 내리 달리며 수십 초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드레일이나 시멘트 옹벽에 부딪쳐 멈출까도 했다. 최소한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중상이다. 오른발을 뻗어 아스팔트를 스쳤다. 소용이 없었다. 다행인지 지나는 차는 없었다. 비에 씻긴 나무와 풀들이 시퍼런 공포로 무신경하게 스쳐갔다. 몇 굽이를 도는 동안 터무니없이 한심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절망적이었다. 제비 같이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꼴이다. 곧은 길이 잠깐 나타났다. 이대로 처박힐 순 없었다. 몽골의 마상무예처럼 오른발을 왼쪽으로 옮겼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자세다. 왼발을 페달에서 뗌과 동시에 양발로 땅바닥을 긁었다. 츠츠츠! 멈췄다. 머릿속이 허옇다. 길바닥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어제 영동에서 영서로 넘어올 때 제동장치의 이상을 느꼈었다. 영양에서 손보려던 걸 설마 하고 지나쳤던 거다. 홀로 여행은 만사불여 튼튼이다. 동행자나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위험은 고스란히 혼자 감당할 몫이다.
삶에서의 제동장치란 멈추고 돌아보고 사색하는 거다. 자본주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식민과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 탈출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삶의 척도는 성공과 사회적 위치로 각인되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외피만을 보았지만 그들은 정말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일한다. 도시나 농촌이나 구분 없이 길 위의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씽씽 달려 나갔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어둑한 새벽에 깼다.
마당에 앉아 식은 커피를 마셨다. 빈 술병 버리러 빌라 쓰레기 수거장에 갔다. 누가 기타 케이스를 버렸다. 호기심에 열어보니 작고 이쁜 클래식 기타다. 줄을 퉁겨보니 음이 조율된 채였다. 기타를 들고 와 마당에서 익숙한 노래를 쳤다. 기억이 새록새록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