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를 읽고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서 억압받는지에 대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역사는 문화를 만들며 관습과 제도 속에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강제적 장치도 만들어진다. 규정이라는 개념화는 혁명적인 세력이 변혁을 일으키기까진 변화를 거부한다. 역사의 무대에서 변혁의 바람이 된 것은 주변의 혁신적 사상이 주류에 틈입하여 커다란 물길을 이룬 탓이다.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등 문화의 전 부면에서 이룩한 변화의 모습은 유독 남성과 여성으로 대표되는 젠더의 문제에서만큼은 끈질긴 전통을 붙들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유교 문화의 습속은 여성을 남성과 수평적인 개체로 인식하기보다는 하위적인, 열등한 수직적 존재로 대상화 해왔다. 살림을 배워 나이가 차면 결혼해 시댁의 귀신이 되는 건 전래의 구습이라고 여기지만 오늘까지도 습속의 DNA는 강하게 각인되어 무의식 속에 남았다. 가족(남편과 자식)에 대한 희생과 헌신은 여성의 미덕이었고 여성의 역할이었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내세우지만, 실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주의의 영향에 다름 아니다. 여성이 가정에서 육아와 내조에 전념하는 동안 남자는 나라에 충성하라는 거였다. 여성의 주체적 의사는 배제된 채 열녀비가 세워졌고 남자들은 그걸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 대대로 보전했다.
「붕대 감기」는 미용실의 실장 해미와 직원인 지현이 첫머리에 먼저 등장한다.
이어 고객과 고객은 친구, 딸 등으로 관계를 확장되며 그물처럼 얽히며 서사를 이룬다. 고객인 은정은 영화 홍보회사에 다니는데 어느 날 아들 서균이 유치원 소풍 갔다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 아이의 입원이 계속되자 아이의 불행이 자신으로 비롯된 것인 양 자책을 한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남편은 다시 회사에 나가지만 은정은 아이 돌보는 역할을 맡으며 경단녀가 된다.
미용실 실장 해미의 조수인 지현은 여성운동을 하지만 해미와의 대화에서 사실을 쉽게 터놓지 못한다. 지현은 여성의 외모를 가꾸는 미용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탈코르셋 운동' 과의 괴리감으로 고민한다. 해미는 남자 친구와 함께 사는 이유를 '착해서'라고 지현에게 말해준다.
율아는 은정의 아들 서균이와 유치원 친구이며 남자아이들처럼 배틀 게임을 좋아한다. 그런 아이의 취미를 엄마인 진경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라며 내버려 둔다. 그녀에게 여자다운 것, 여성스러운 것의 족쇄는 없다. 자신의 내면에 상처로 기억되는 '여성스러움'이란 구속과 강제란 생각이다. 진경은 고교 시절 단짝 친구인 세연과 요즘 서먹하다. 세연은 출판기획자이며 독신인데, 둘은 기혼과 비혼의 입장 차이로 갈등한다. 그것은 대화의 부재와 상대인 타자를 인정하기에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다.
'여성주의', '페미니즘'이 사회 일반에 도드라진 건 근대의 일이지만 그것이 남성 중심의 단단한 벽에 막혀 '여성 혐오'란 기형적인 저항을 받는 것도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통과 보수의 시각에선 아직도 여성은 철저히 대상화에 머무른다. 여성운동이 단순히 남성 중심의 사회를 변혁하는 '여성 상위'를 말함이 아니라 '양성평등'의 가치를 지향함에도 일부 마초적인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동등한 인식을 불편해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라고도 말했다. 전쟁, 침략 등으로 타민족의 지배를 받기 시작할 때 제일 나중에 안착하는 것은 문화다. 인간의 의식은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남성 주도의 문화에서 희생과 봉사를 미덕으로 은연중 강요해 왔다. 원리주의에 매몰되어 딸을 살해하는 명예살인은 아직도 일부에서 묵인되고 있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진경의 선배 윤슬은 이혼녀이며 포토그래퍼였으나 개인 작업실을 갖기 위해 투잡을 뛰는 윤슬에 대한 소문이 '헤픈 여자'로 돌고 남자 동료에게 성폭언을 듣자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간다. 부모의 농장에서 농사를 도우다 자연에 동화되는 삶에 만족을 느낀다. 대학교수 경혜는 제자 채이와 가깝게 지낸다. 채이가 남자 교수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붙이자 지원한다. 그러나 여성주의 운동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채이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대학 선후배 관계인 형은과 채이. 형은은 구호뿐인 선배들의 여성운동에 멀미를 느끼며 채이와 멀어졌다 화해했다를 반복한다. 형은의 엄마 명옥은 젊은 직원들의 시선이 두려워 일찍 퇴직했다. 회사 후배 효령은 명옥에게 셰어 하우스를 제안한다. 효령은 명옥의 노후를 염려해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효령은 몇 년 전에 한쪽 유방의 일부를 잘라냈다. 「붕대 감기」의 등장인물은 직업과 학교, 엄마와 딸, 선배와 후배 등의 관계로 이어지며 확산과 반복의 일상을 산다. 인물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대화를 통해 드러나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갈등과 고민이 서사를 이루며 진행된다
'오전에는 드라이와 커트 손님이 각각 두 명씩 있었고, 점심을 먹고 나자 미리 예약해둔 파마 손님이 왔다. 손님이 스타일북을 보며 어떤 파마가 어울릴까 고르는 동안 해미는 카운터에 있는 지현에게 가서 고객관리 문자를 보내라고 시켰다.' 윤이형 소설 「붕대 감기」의 첫 문장이다.
소설은 미용실 직원의 등장으로 시작해서 손님과 손님의 주변 인물이 차례로 등장하며 거미줄처럼 엮인 관계의 서사를 풀어 간다. 성폭력으로 대학에서 퇴출당한 '천' 외에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의 관계를 드나들며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탈주를 모색한다. 그러나 작가는 문제의 해법에 대한 제시보다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 갈등과 현상의 고통을 말해주는 데 몰입한다. 여성주의,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안 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형은은 말했다. 서로 가려는 방향이 전혀 다른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닌데, 억지로 함께 가자면서 차이를 뭉개버리는 게 옳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당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하자는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자꾸 머리를 눌러 짜부라뜨리려는 손이 있는데 어떻게 그 손을 잡아?'
대학생인 형은과 채이는 여성 운동 내부에 몸 담고 있으면서도 운동 구성원과의 갈등에 괴로워한다. 운동 내에서도 벌어지는 차이와 분열은 감정적 존재인 인간의 속성으로 보아도 떨쳐낼 수 없다. 여성은 젠더이기 전에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론 운동 내부에서 대립과 갈등을 낳으면서도 구성원과의 대화를 심화시키고 연대를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비판적 연대'의 대목이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해내고 싶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성주의라는 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서, 자신도 그 안에 있다고, 우리는 적이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여성은 여성에게 너무 쉽게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해요. 서로를 그렇게 적대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세연의 진심이기도 했다.'
출판기획자인 세연조차 여성과 여성과의 연대에 내부적인 갈등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운동의 세대 간 인식 변화에 선배 세대로서 가치관의 변화에 자신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인식의 변화는 실천의 모색으로 작용한다. 나이 듦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세계관이란 없다. 변화와 성장이 삶을 삶답게 하는 토대인데 그것이 없는 삶은 삶을 진부하게 만들 뿐이다. 세연은 흔들리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연대의 질문을 던진다.
'젊은 여성들은 세연보다 훨씬 정치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친분 관계만큼이나 입장과 노선, 공유할 수 있는 목표가 중요한 것 같았다. 그 입장과 노선, 목표에 따라 인간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진경과 세연은 '붕대 감기' 교련과목 실습시험에서 짝이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경은 결혼하고 세연은 독신으로 홀로 산다. 둘의 관계는 기혼과 비혼, 우정과 고백 사이에서 점점 멀어지지만 상상의 대화에서 화해를 시도한다. 하지만 실제에선 엇갈린 갈등의 연속이다. 관계에서 동일성의 요구보다 다름을 인정하는 건 용기의 다른 방식이다.
'나도 너만큼이나 죽을 것 같았거든. 아이들의 시선에 맞춰 완벽하고 성격 좋은 모범생을 연기하는 게 답답하고 숨이 막혔어. 너하고라면 말이 잘 통할 것 같았어.'
인정 욕구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성장하면서 내면에서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는 건 학습화된 욕망의 결과다. 성인이 되어 사회의 시선에 포획되면서 여성에 대한 강제된 규범에 자신을 내맡긴다. '구속의 자유'란 말은 강요된 힘의 구조에 편입해 순응하는 생존전략이다. 여성이면서 여성을 폄하하는 건 남성 중심의 타율적 시선을 내면화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 내면화란 동등한 개체로서의 인식 주체가 아닌 지배와 질서로의 대상화의 논리다. 나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관을 몸에 습득한 채 자랐다. 딸은 아들보다 늘 다음 차례였고, 집안 행사를 할 때면 며느리들은 주방에 있었고 남자들은 화투 치며 음식상을 받았다. 시집간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후 살면서 여성주의에 눈 뜨면서 여성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습속은 해묵은 때처럼 씻어내기 어려웠다. 단순히 수동적 역할론에 사고를 두려는 건 아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성찰은 전방위적인 자기 평가를 낳았다. 젠더의 차별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상 곳곳에 각인된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작가는 독신의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어떻게 연대하는 삶을 모색하는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혈연에 기반한 가족주의 개념의 해체다.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탈근대적인 가족의 모습은 지금도 변화하고 진화한다.
효령은 직장 선배였던 명옥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며 선배의 딸인 채이에게 허락을 구한다. 그러면서 가족이라는 개념 정리와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셰어 하우스의 실천을 꿈꾼다. 셰어 하우스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공간이나 시설 따위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같이 사는 집을 말한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모여 살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혼자 사는 외로움과 불안감도 떨쳐 낼 수 있고 정서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주거 형태다. 가족이라는 관계로 쉽게 상처를 주고 상처 받는 모습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삶이란 가족의 기존 관념을 초월한 행복의 조건 중 하나다.
「붕대 감기」는 출세와 성공이라는 목표 지향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이항대립을 넘어선 독자적 존재로서의 살아남기를 모색한다. 역사를 보면 인류가 언제나 그리워한 것은 자유였다. 인류의 창조적 에너지의 바탕이 자유였기 때문이다. 젠더라는 이항의 틀 속에 갇히지 않고 인간 전존재로서의 삶을 찾는 여성의 갈등과 노력은 젠더를 초월한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대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함께가 아니었던 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또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진경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세연은 진경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고...'
진경은 오랜 침묵과 갈등 끝에 세연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그것이 미움 섞인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의 회복은 삶의 현실에서 비롯된 여성의 고단한 삶을 위한 비판적 연대의 실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