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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일기 4

by 소인


휴양림 관리 오 일째.
오늘 작업은 숙소 앞 잔디밭에 있는 벌집을 제거하고 예초작업 후 폭격 맞은 것처럼 널브러진 긴 풀을 치우는 일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야영 데크 주변과 물탱크 주변 풀베기다. 야영 데크는 텐트를 치는 계곡의 경사로를 따라 열두 군데 설치했다. 데크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밤이면 은은한 조명도 깔린다. 가운데 아름드리 낙엽송이 섰고 주위엔 두릅나무, 고무 딸기, 개다래, 싸리나무 등속이 에워쌌다. 며칠 전 휴양림 담당자가 멧돼지를 본 이후 야영 데크 주변을 펜스로 둘러치기로 했다. 어제 자재를 싣고 온 인부들이 작업 하느라 낑낑대며 돌계단으로 자재를 밀어 올린다. 가만 보니 서양 사람 둘이 자재를 나르고 한국인이 한 사람이 반장이다. 툭툭 던지는 반말조의 명령이다. 양지 빈달에 심은 맥문동 이파리가 노르께하다.

예초기를 메고 야영 데크 쪽으로 오르면서 인사를 건넸다. 젊어 보이는 인부가 아는 체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러시안이란다. 어쩐지 표도르를 닮았더라니. 일이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양팔을 벌리며 끄떡없단 시늉이다. 조심해서 천천히 일하라고 하며 오른편 데크로 올라섰다. 동료가 낫으로 돌 틈의 풀을 제거하는 사이 데크 주변의 큰 풀을 벴다. 물탱크를 빙 돌아 까까머리처럼 깎은 다음 좌측 데크 주위를 베며 내려갔다. 코코넛 껍질로 만든 매트를 나르는 러시아인들은 땀나는지 이번엔 웃통을 벗어부치고 돌돌 만 매트를 밀고 올라온다. 가슴털이 숭숭하다. 다부진 몸통이 힘꼴깨나 쓰겠다. 그들이 한숨 돌리는 사이 조심스레 하루 일당을 물었다. 힘든 일은 팔만 원, 보통은 사만 원을 받는단다. 내가 놀라면서 정말이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잘못 들었나. 아무리 외국인 노동자 임금이 박하다고 해도 농사일하는 아줌마 품값만도 못하다니. 쓴맛이 올라왔다.

환삼덩굴이 까끌한 줄기로 잔디를 덮는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며느리밑씻개라니 오살할 시어미가 며느리 잡으려고 환장한 이름이다. 세상은 보이는 만큼 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인식 너머의 삶은 무궁하고 웅숭깊다. 세상의 습속을 따라가면 진부한 끝물밖에 만나지 못한다. 어쩌랴. 지각의 판단은 고구마 줄기로 벋지 못하고 다디단 덩이에 머물렀으니. 토가 나온다. 要吐了, 吐気が出るほどだ。 먼 과거도 아닌 우리는 하와이로 만주로, 중동으로, 베트남으로 몸을 밑천 삼아 남의 나라에 돈 벌러 떠났다.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자세는 고약한 시어미요 악덕 마름에 다름 아니다. 차별적 시선은 돌아보지 못하는 인식의 벽에서 질긴 싹을 틔운다. 박경리 선생의 지론은 일본은, 전쟁에 대한 반성을 모르는 일본 정권은 증오하되 일본인은 사람으로서 품으란 얘기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당직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점심 도시락을 먹고 눈 좀 붙이니 좀 개운하다. 동료들은 숙소의 마무리 청소로 올라가고 나와 다른 동료는 벌집을 처리하러 올라갔다. 숙소 앞 너럭바위 밑에 붙은 벌집엔 다리가 긴 벌이 웅웅 대며 모여 있다. 땅벌이나 말벌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혹여 손님이 쏘이면 큰일이니 벌집은 눈에 뜨이는 대로 그때그때 없애야 한다. 동료가 토치와 에프킬라를 양손에 들고 벌집을 향해 등을 구부리고 다가섰다. 눈치챈 벌이 움직일 찰나 득달같이 달려들어 불과 살충제의 포격을 날린다. 화염과 화생방의 공격에 벌들은 나가떨어지고 땅바닥으로 데굴데굴 구른다. 뒤에 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벌을 향해 막대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허우적일 뿐 벌은 성난 날갯짓으로 도망간다. 땅에 떨어진 벌집에서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동료는 재빠른 동작으로 벌집을 밟아 짓이긴다. 불과 몇 초만에 살충제를 뒤집어쓴 벌들은 벌벌 기면서 최후를 마친다.

쉴참 집에서 싸온 구운 계란을 꺼냈다. 다섯 개. 세 개를 들고 러시아인이 일하는 곳으로 갔다. 표도르를 아냐고 농을 걸었더니 자기가 표도르 친구란다 뻥은! 그러면서 귀밑머리 아래로 땋은 꽁지머리를 보여준다. 스트롱맨이라며 엄지를 세워주었다. 삶은 달걀이라며 머리로 깨는 시늉을 하며 주니 고맙단다. 내려와 동료와 하나 씩 나눠 먹고 찬물을 마셨다.

사흘 째 휴양림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의 비구름이 여전하다. 계곡 가운데의 개울엔 가문 탓으로 물길이 드문하다. 개울가의 금계국이 노란 꽃송이 물결치며 바람에 하느작댄다. 불더위가 곧 몰려올 테지만 요 며칠 바람은 상쾌하다. 예초기를 메고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내리며 풀베기 닷새 째. 땀은 비 오듯 흘러도 조금씩 바뀌는 풍경에 마음이 정갈해지는 느낌이다. 해발 1,205미터의 소나무 임상이 파도처럼 태백산 줄기로 이어지는 문수산은 문수(文殊) 보살의 전설을 품은 산이다. 신라 시대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축서사는 독수리를 품은 형상으로 봉화, 영주 땅을 내려다본다. 서북으로 축서사와 동으로 백두대간 수목원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지은 생태 체험형 휴양림인 문수산 휴양림은 칠월 본격 개방을 앞두고 있다. 이미 주말엔 몇 가족이 숙소를 예약했다. 휴양림이 들어선 장소는 준고랭지인 해발 400~500미터의 고도로 인간이 편안함을 느끼는 최적의 높이다. 주로 소나무 임상(林相)이지만 잣나무, 전나무, 고로쇠나무, 신갈나무서껀 다양한 수종이 혼재된 천연림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상쾌한 삼림욕의 기운이 온몸에 느껴진다.

까라면 뭐로 밤을 깐단 얘기는 을의 체념이고 일상화된 갑의 폭력이다. 위계는 서열만이 아니라 단단한 차별의 고착을 형성한다. 휴양림과 사람과의 관계는 보이는 만큼 위계가 존재한다. 원시의 숲이라면 만남조차 전무했을 것 같지만 이미 우린 차별적 관계를 문신처럼 안고 태어난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아 숲을 베고 산을 뚫었다. 소멸되어야 할 비문(非文)은 자유, 평화, 인권이 아니라 차별적 시선의 배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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