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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일기 5

by 소인


타계한 생태 사상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선생은 코로나 환란 앞에 "당장의 기술적 해법만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찾을 필요가 있다.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라고 말했다. 얼마나 간명한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인가. 선생의 지적은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뒤통수에 꽂히는 화두의 작살이다. 알거나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거나 인간은 어쩌다 태어난 무한 경쟁의 벌판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생존의 게임을 벌인다. 현대 사회에 스승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승은 도처에 즐비하다. 자본의 독식이 그렇고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의 홍수, 남북한의 날 선 언어와 국제적인 힘겨루기, 더워지는 지구와 털가죽만 남아 피골이 상접한 북극곰의 눈물이 스승이요 경계다.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에다 시인의 절망적인 한숨, 대체 얼마나 외쳐야 꿈쩍이나 할 건가. 어차피 한 번뿐인 삶, 멀리 볼 것 없이 현실의 잣대와 쾌락에 탐닉하는 자 복을 받는다? 절대 아니라고 손 저어도 발은 어지러운 땅을 딛고 휘청거린다.

두 번째로 보건소에 갔다.
감염병관리팀에 가서 딸의 입국 날짜와 공항 도착 시간, 전화번호 등을 적어냈다. 용모파기(容貌疤記). 딸은 잠재된 양성 의심환자로 들어온다. 동선과 움직임이 시간대 별로 감시된다. 공항에서 발열 체크를 하고 안내에 따라 KTX 광명역을 거쳐 동대구역으로 내려온다. 어두운 마을이 지나치며 간간이 불빛이 보이는 낯선 밤을 멀뚱히 바라보며 앞으로 예상되는 상황을 점친다. 사설 구급차를 타고 집에 오면 장모와 나와 아내는 먹을 것, 필요한 물품을 챙겨놓고 이미 집을 떠난 후. 2주 동안 떨어져 지내야 한다. 격리 생활이 끝나고 재검사 후 음성으로 판명 나면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 보건소 직원은 담장 너머로 손 흔들어도 되지 않느냔 나의 실없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늦은 오후 마트 가면서 곰곰 생각한다.
딸아이가 입국해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상황을 주변 사람들은 안다. 그러나 동네의 이웃집은 모른다. 잦은 왕래나 대화가 없기 때문이지만 구태여 자가 격리를 알릴 필요는 없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인간은 동질이 아닌 외부의 것에 배제와 혐오의 차별 의식을 생래적으로 지닌다. 잘 지내던 사람과의 대화가 정치 얘기로 옮겨가다 표변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평소에 법 없이 살 것 같은 사람이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강하게 지닌 걸 느낄 수 있다. 드러나지 않던 내 편 의식은 위기가 나타나면 돌출된다. 전쟁을 창조의 어머니라고 부추겨 아시아 민중을 학살, 살해한 일제의 야만적 행위는 정작 자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 평화론의 선구적 행위로 비친다. 무운장구와 천황을 위해 옥쇄를 불사하는 어리석음도 간단히 치러낸다. 조선, 대만 등 식민지 국가를 이등 국민으로, 본토 국민을 일등 국민으로 설정하고 내선일체를 강요하며 학병, 징병으로 피지배 민중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유태인, 이방인, 장애인, 정신병자, 반체제 지식인을 묶음으로 차별, 배제하는 의식을 독일 국민에게 주입시켰다. 결과는 참혹한 학살과 처형으로 이어졌다. 나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현재도 진행형이다. 자신도 지난한 가난 탈출의 과거를 지녔음에도 을의 고투를 외면하거나 비난한다. 계층 간 위계의 질서 안에서 외부로부터 틈입하는 모든 종류의 세력은 불순하고 불온하므로 없애야 한다는 것이 권력과 부를 거머쥔 계층의 헤게모니다. 딸의 격리 사실을 알릴 이유도 알릴 필요도 없다. 이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휩쓸리는 집단 무의식을 걱정해서다.

장모를 처남 집에 맡기고 아내와 난 휴양림에서 텐트 생활을 하기로 했다. 난 휴양림 기간제 관리원이다. 삼교대로 근무하는 대로 일하면 되고 아내는 아침에 텐트에서 일어나 밥 먹고 장애인 활동 지원하는 집으로 출근하면 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주다. 산새 소리에 잠 깨고 숲 공기 마시며 출근한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 짤랑대는 소리, 풀벌레 소리에 귀담으며 잠드는 경험이란 다시없는 추억일지 모른다. 폭우가 쏟아지면 급한 철수를 감행해야 하지만 그것도 방책은 있다. 잠시의 불편을 감수하고 친척 집으로 대피한다. 밤하늘의 뭇별은 여름밤을 채우고 산중의 선득한 기운은 삼복 불더위를 잠재우고 남을 거다. 매일 딸의 건강을 체크하며 필요한 게 있으면 담 너머로 던져준다. 나와 남을 위한 격리지만 김종철 선생의 말대로 인간은 생태와의 공생에 대한 중대한 기로에 섰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만능이라는, 그래서 파괴되고 희생된 생태와 자원에 대한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해 뼈를 깎는 각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이대로 생태와 자원이 파괴된다면 인류의 문명은 공멸할 것이라는 미래학자의 예언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한쪽에선 남아돌아 썩어 자빠지고 한쪽에선 기아와 질병으로 절망적인 삶을 사는 기형의 양상이 당연한 듯 벌어진다. 위대한 현자의 가르침도 정치•경제제도의 대안도 종교의 경전도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다.

저녁부터 시작한 비는 밤새 줄기차게 쏟아진다.
장엄한 빗줄기 소리 들으며 노래를 불렀다. 사냥을 나갈 수 없는 인류의 조상은 빗소리를 들으며 동굴의 밤을 어찌 보냈을까. 살아남는다는 생존을 필생의 목표로 종족을 번식한 인류의 문명은 지금에 이르렀다. 오염된 대기, 시궁물이 흐르는 강과 하천, 자원이 말라 가는 바다가 펼쳐진 미래의 지구 환경에서 인류는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외계의 혹성을 식민지로 만들까.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침투에 무너지는 인류의 문명이 과연 지속 가능한 문명의 확장을 이룰 수 있을까. 전망은 없다. 스스로 답이 없는 무한질주의 궤도를 탈주하지 못한다.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지만 실은 인간에 걸맞은 사유의 실천을 유보한 채 살아간다. 내일 아침 뒤란을 뒤져 우비를 찾아볼까. 큰 물에 잠긴 집이, 살림이 동네가 인간의 탐욕과 허무가 똘똘 뭉친 공동체의 운명이 황톳물에 퉁퉁 불어 떠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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