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의 산그늘 속이다.
눈망울이 큰 소의 등 같은 소백산 구릉이 부옇다. 비 갠 후 바람에 섞인 송홧가루가 풍경을 가린다. 바람이 힘을 모아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솔순에 달린 수꽃 가루가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입자처럼 비산한다. 연초록의 커튼이 좌르륵 펼쳐진다. 저편에서 볼 때는 이쪽도 만만치 않을 거다. 공중에 흩어지는 정자의 폭포는 한 사흘 지나면 숨을 돌리고 담배를 뽑아 무는 사내처럼 한숨의 정기로 남을 거다. 생명을 조합하는 남녀의 성합이 그러하듯 열락의 터널을 통과한 공허한 뒷맛. 시초의 지구가 그랬던 것처럼 태양의 발전과 광합성으로 식생이 자라고 멸절을 되풀이한다. 순환의 과정에 동물도 끼어들었는데 인간의 조상인 유인원은 생존을 버텨내며 사냥터를 돌아다녔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동굴 입구에서 그가 본 석양의 적요는 한밤중 홀로 깨어 마주하는 도시 속의 고요와 닮았을까. 현존재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려가는가.
사과꽃이 지고 가지마다 우렁한 잎사귀가 큰다. 수확의 품과 공간의 효율성을 위해 어릴 때부터 사다리 모양으로 길들인다. 양팔을 벌린 사과나무 가지는 제식훈련하는 허수아비 마냥 열과 오를 맞춰 사과를 매단다. 월든 산기슭의 야생 사과나무 같은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 과수원의 목적은 최상품의 사과를 만드는 거다. '보기 좋은' 과정은 생략되었다. 잡초는 농약으로 제어한다. '다스림'은 이편저편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적의 방법을 도모하고자 함인데, 제어는 수렴의 과정보다 단속(斷續)의 방법이다. 탐스런 사과 알과 상관없는 풀과 해충은 끊고, 즉효가 나타나는 농약 비료와 인연을 맺는다. 여타의 통섭 관계가 사라지는 형국이다. 너와 나의 허물 벗은 속삭임이 사라지면 관계는 단절된다.
아내는 비상식량을 사모았다.
생수와 통조림을 사고 구급약품을 배낭에 채웠다. 동일본 대지진이 나고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것을 보니 세상 끝날이 머지않을 거란다. 울진 원자력이 터진다면? 이년 삼 년이 지나고 이후 아내는 배낭의 물과 참치캔을 헐어 찌개를 끓였다. 홀쭉해진 배낭은 다시 구석에 처박혔는데 코로나 창궐 이후 생존 배낭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단수 단전이 일상의 움직임을 끊으면 구조하러 올 때까지 버텨야 하니 배낭을 새로 채워야 한단다. 인터넷 쇼핑에 가면 생존 키트가 불티난다. 다들 집에 갇혔는데 누가 구조하러 온다는 말인가. 코로나의 영웅처럼 목숨 걸고 구조라고? 그들도 가족이 있고 그들 또한 옴짝달싹 못한다면 구조는 난망이며 설령 구조되어 밖에 나간다고 해도 널브러진 죽음의 거리에서 무엇을 한다는 건가. 물과 음식이 바닥나고 죽기만 기다릴 거다. 촛불처럼 사위는 생명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어디론가 향해 기도할지도 모른다. 흔한 마스크를 요일별로 사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앞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삶의 길목 도처에서 기다린다. 걸어가면서 먼 곳의 사람과 통화하는 게 꿈이었던 것처럼.
코로나 이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부닥친 인간은 현존재에 대한 어떤 각성을 드러낼까. 때죽나무가 바람에 싱싱한 잎들을 맡기고 출렁인다. 뻘투성이인 발 젖은 트랙터가 바쁜 걸음으로 지나간다. 모내기 펜데믹이다. 중백로가 삶아놓은 논바닥에 머리 처박고 개구리를 노린다. 보름 후면 온 논에 꼿꼿한 어린 모가 땅 냄새 맡느라 바쁘리라. 송홧가루가 지붕이며 차유리, 장독대를 점령했다. 아침에 와이퍼를 돌리면 간밤에 쌓인 송홧가루가 우수수 쏟아진다. 강원도 살 적에는 해마다 송화 따서 다식을 만들어 먹었다. 초여름 이파리 사이 환한 햇살이 물결치는 감나무 아래서 벌꿀로 반죽한 다식을 베어 물면 모시적삼 입은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먹는 것 하나로도 도락을 즐기는 셈인데 그건 순전히 아내의 수고로움에서 비롯된 거다. 송화다식 하나에는 숲의 바람과 물, 태양의 광선과 여물기 전에 따서 말리고 물에 받쳐 거르는 일련의 수고가 스며 있다. 버무린 꿀은 또 어떤가. 벌떼의 생존이 집적된 꿀의 채취는 인간의 면에서 보면 이용이지만 벌의 입장에선 약탈이다. 단지 서로 생존이 가능한 적절한 관계의 유지가 지속되므로 통섭의 관계는 멸절되지 않을 뿐이다. 요리 프로의 레시피를 들여다보면 지구의 생태가 담겨 있다. 지나친 레시피는 약탈이다. 먹방도 현대인의 병증을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다식을 먹으니 코에서 입에서 솔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송홧가루 날리는 솔숲에서 일하다 달려갔더니 여자는 내 몸에서 솔 냄새가 난다며 쪽쪽 빨아댔다.
장소에 대한 기억은 인간의 역사를 추동하는 동력이다. 트라우마는 고통에 대한 각인이다. 짜증이나 스트레스는 일시적 감정의 불편함으로 환경이 바뀌면 해소가 가능하지만 각인된 트라우마는 치유가 어렵다. 화석처럼 새겨진 고통의 기억이 무시로 되살아나 현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장소와 기억에 대한 판단과 소환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앎이 없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진부하게 들리지만 실상이다. 주민등록번호의 생년월일을 또박또박 외고 태어난 시(時)까지 알면서 그것보다 앞선 것에 대한 건 당연히도 알려하지 않는다. 가까이는 인류의 역사지만, 길게는 태양계의 시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행복해야 한다. 생명, 무생명의 공존에 대한 가치보다 자신을 세상의 주체로 인식하며 소유와 증식이 세팅된 현대인은 주체를 강조한다. 너와 나의 이분법은 상대를 객관화, 사물화한다. 그러면서 생태의 전존재를 무너뜨린다.
구동마을 서원 마당에 들어왔다. 사위를 둘러싼 벚나무, 단풍나무 이파리가 무성한 병풍을 이루었다. 늦게 촉이 나온 느티나무가 참새 혓바닥만 한 잎을 허공에 낼름댄다. 민들레 날아가고 진덕문(進德門) 앞 육덕 좋은 여자 같은 모란이 화장 중이다. 회양목 새순이 폭포처럼 치렁한 그늘 도시락을 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