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본(중앙 재난안전 대책본부)과 경상북도청, 군청으로부터 하루에 대여섯 번씩 문자가 날아온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절정에 달한 사월엔 쌓인 문자가 하루에도 한 달치 약봉지처럼 줄줄이 매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 수칙이 신물 날 정도로 되풀이되어 날아오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열어본다. 도시에서의 소규모 확진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가을 대유행의 전조인지 의심이 든다. 이십 세기 초 스페인 독감 때 흑백사진에서 가족과 함께 고양이까지 마스크를 낀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두 눈만 동그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사진의 분위기는 공포 자체였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공포와 죽음, 이별의 아픔 등 극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의 인간 군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폐쇄된 도시 오랑에서 극한의 절망과 마주하는 인간 군상. 죽음이라는 엄혹한 인간 조건 앞에서도 억누를 수 없는 희망의 의지를 역설한 「페스트」는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경험한 동시대인들에게 큰 공감을 얻어 냈다. 공동체의 절망에 대한 저항과 외면, 출구 없는 빛으로의 끝없는 탈주가 인간 존재에 대한 표상이라면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의 상황과 무엇이 다른가. 과학의 발달은 유전자 지도를 읽어내고 인공 와우(蝸牛)를 심어 질환으로 난청이 발생한 환자의 청력을 되살리고, 까마득한 우주 공간을 일 년 넘게 날아가 화성 땅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실시간으로 전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종의 생태종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지구의 습성을 인간은 뛰어난 두뇌와 기술로 죄다 밝혀내지 못한다. 결국 과학과 문명은 질병과 전쟁, 자본의 탐욕과 인류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연대를 위한 공감으로 가까워지기는 커녕,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괴성을 지르며 무한 질주 중이다.
돈과 노동, 성공과 행복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궁구하는 인문학 열풍이 대세다. 하지만 존재 조건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형이상학의 깨달음을 강조하기에 현대의 질병은 상처가 깊다. 그러나 인간은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존재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불온한 상상력을 수반하지 않고는 지구의 구석에서 더 이상 숨쉬기조차 힘들다. 고전 인문학자 고미숙은 욕망이 잦아듦으로 인하여 인생에는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질병 역시 쓸데없는 욕망을 자제하는 효과가 있고, 탐진치(貪, 嗔, 痴) 즉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조절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통은 살아 있는 존재의 자각적 인식이란 말처럼 질병, 고통의 이유를 존재의 탈주로 이어가는 그녀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돌아보지 않는 자는 추락이 기다린다. 우리는 일생에도 수십 번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약하디 약한 어린 새다. 그러니 사유하지 않는 자, 불운은 그의 몫이다. 행불행에 대한 기준도 인식도.
집에서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딸에게는 필요한 식품과 일상용품을 준비해두고 우리는 십사 일간에 소용되는 물품을 대략 메모해 정리했다.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 항목도 중구난방이다. 떠오르는 대로 적다 보니 자꾸 늘어난다. 빠진 건 그때그때 구입하고 딸도 필요한 게 있으면 사다 담 너머로 던져주면 된다. 십사일은 짧은 경험이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격리와 절망의 바람이 불어올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캠핑 준비물(14일 분)
텐트, 그늘막
버너 코펠 가스, 물통(10L)
침낭, 깔개 2, 랜턴, 등 1, 모기향
쌀, 즉석국, 김, 통조림, 생수,
세면도구(비누•치약/칫솔•때수건•주방세제/수세미/행주), 화장지, 도시락, 작은 상,
컨테이너 3
수건(비누/치약/빨랫비누)
옷(속옷, 양말, 남방), 신발, 모자, 마스크, 손소독제, 노트(필기구), 실내화 2
식기, 잔, 칼, 수저, 도마, 바스켓 1,
아이스박스(아이스팩), 반찬통
밥통, 포트, 커피, 쟁반, 바구니
멀티탭, 충전기, 무선 이어폰, 노트북, 약(보일러 냉장고)
guitar, 옷걸이, 빨랫줄, 집게
고기•숯 석쇠, 포일
*청소기, 대걸레, 대야, 쓰레기봉투
혹여 일과 바깥 생활에 물리면 개울에 나가 파리낚시를 던질 수 있다. 낚시도구는 뒤란에 두었으니 살며시 가져오면 된다. 뒤란은 딸의 동선이 아니다. 이 미터 이상 거리두기는 격리자와 가족 간의 지켜야 할 수칙이니 십사일만 철저히 지키면 된다. 수년을 오가며 능통한 외국어를 써먹긴커녕 시간제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게 코로나 이전에도 현실이었다. 딸에게 격리가 끝나면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라고 일렀다. 청년 백수면 어떠랴. 고미숙의 말대로 백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창조하는 절호의 기회다. 자본과 노동과 생산과 소비의 순환 고리만을 경전으로 삼는 상황에 본래의 순일한 감성을 닦고 다듬어 성찰하는 존재로 가는 운 좋은 길이기도 하다. 아직도 꼰대들 사이에서 나이가 몇인데 시집 장가를 안 가다니? 얘는 안 낳고? 번듯한 직업은? 하고 의아해하는 말이 오간다. 결혼과 2세, 노동을 행복의 조건으로 치는 시대는 지났다. 밥을 빌어도(그렇게까지야)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의 여정을 스스로 반짝이는 여름밤의 뭇별처럼 헤아릴 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입국 이틀 전.
본인도 검색하겠지만 딸에게 자가 격리에 대한 정보를 보냈다. 평소 비자 마감일에 따라 자유롭게 오가던 곳을 삼 개월 연장되고 보니 갑갑증이 인다고 했다. '완벽한 좋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지구의 인구만큼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겪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