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 (294)


아침부터 햇볕이 따갑다.

이런 날은 강에 나가 루어 달아 플라이낚시 즐기면 제격이다. 물이끼 덮인 바위틈을 조심조심 내려가며 물살에 종아리 씻으며 루어 던지면 겁 많은 꺽지 덥석 물고 덤벼든다. 하늘 푸르고 초록의 소나무 새순 바늘잎 날카롭게 초여름의 구름 찌르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 누비는 자연이란! 낚시라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 형 따라 무던히 다녔다. 우리 가족은 여름이면 솥단지 싸들고 북한산성에서 더 들어간 효자리 개울에서 놀았다. 유리 어항 엉덩이에 밥 섞은 된장을 붙여 물 흐름이 약한 바닥에 앉히면 금세 피라미, 불거지, 버들치가 어항이 깨질 정도로 가득 찼다. 마른나무 주워 매운탕 끓이고 맑은 물에서 형제들과 종일 멱감다 해거름에 벌겋게 탄 얼굴로 돌아오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버지를 따라 낚시 다녔다. 지금은 카본 대 이상의 품질 좋은 낚싯대가 천지 빛깔이지만 그때는 대나무 낚싯대였다. 굵기가 다른 마디를 끼워 기름한 낚싯대 하나가 완성되는 거였다. 밤낚시는 찌에 야광 테이프를 감아 카바이드 불빛에 반사되는 형태였다. 일체의 소음이 사라진 밤 저수지의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찌 놀림은 숨이 멎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 장교 시절 군목에게 낚시를 배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가족은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에 살았는데 민간인 통제구역 내의 강에서 낚시하고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흙탕물에서 놀다 중이염에 걸려 베개에 고름이 묻어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에게 배운 민물낚시는 붕어낚시, 계류낚시로 종목을 갈아타며 성인이 된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니 조력은 삼십 년이 넘는다. 광고회사 그만두고 시골살이 이후로도 낚시가방의 먼지를 털고 근처 강과 저수지에서 간간히 낚시를 던졌지만 예전의 열정과는 사뭇 달랐다. 가족이 딸린 처지에 한가한 낚시는 언감생심이었고 물고기 취미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강원도 땅에서 수목 관리할 때 동해로 빠지는 개울에서 감자로 잉어를 낚는 재미에 빠진 것 외엔 한여름 큰 물 지고 맑아진 여울에서 파리낚시로 피라미 낚는 것이 전부다. 민물 매운탕을 즐기지 않아 잡은 고기는 살려주거나 지인에게 주었다. 한편으론 이러다 죽으면 붕어로 태어나 빨간 지렁이의 유혹에 바늘 삼키고 대롱대롱 낚이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잠시 꿈을 꾸어 본다.

나는 지금 감염목 무단이동 감시초소 앞 그늘에 앉아 있다. B면 초소 근무 첫날이다. B면 초소는 머리 위로 내륙 동해 간 자동차 전용도로가 지나고 로컬푸드 나들목이라 종일 차량 통행이 많다. 승용차가 삼분의 일이고 나머지가 트럭, 덤프차다. 교각 아래 사통팔달의 교차로에서 근동 도시로 죽죽 갈려 나간다. 망초꽃, 금계국, 루드베키아가 길가와 공터에 흐벅지게 피었다. 여기서 양조장은 오분 거리라 술 빼는 날 새벽에 아르바이트하고 출근하기 가깝다. 집에서도 십 분이면 오는 거리라 아침 시간이 여유롭다. B면 초소는 칠팔월 두 달 동안 이동 조일 때 수목에 오고, 월화는 S면 초소, 금요일엔 M면으로 간다. 이동조 마치고 9,10월에 B면 초소에서 고정 근무하고 11,12월 마지막엔 3,4월 첫 근무를 시작했던 S면 초소를 끝으로 3월부터 시작한 감염목 무단이동 감시초소 근무원 생활은 기간 종료된다. 단속 실적이 드물다고 해서 초소 운영을 중단할 순 없다. 재선충이 대 발생한 이웃 도시는 삼교대로 야간에도 근무한다고 한다. 기차 타고 여행하다 산자락에 줄줄이 늘어선 소나무 무덤을 숱하게 본 적이 있다. 재선충을 매개하는 솔수염 하늘소는 활동범위가 이 킬로미터지만 태풍과 비바람에 의해 얼마든지 활동반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황사와 미세먼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하는 태풍과 컨테이너에 실려오는 무역 상품, 외국 선박의 흘수선의 물 버리기 등으로 비롯되는 외래의 세균과 바이러스, 병해충은 이제 지구에 걸쳐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농촌의 길가와 공터에서 흔하게 보는 금계국, 루드베키아, 망초꽃은 모두 원산지 북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귀화 식물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꽃이 계란 프라이 같이 이쁘게 생긴 망초는 19세기 개화기 때 들어왔다. 외래 식물이라도 이런 이쁜 꽃을 '나라 망해먹게 생겼다'라고 망한 풀이라고 함부로 부르는 건 삼갈 일이다. 생명력이 질긴 외래의 들풀이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죽기 살기로 배척해서 역사는 꼴이 아니게 된 면도 있다. 봄날 노란 꽃밭 천지였던 애기똥풀이 물러가면 이제 들녘은 망초꽃 세상이다. 두 평 가웃 되는 B면 초소는 M면 초소 면적의 반이라 좁다. 의자 세 개에 석유난로, 선풍기가 있다. 다른 초소에 없는 선풍기가 보여 놀랐다. 후덥지근한 기운에 동료와 차 안에서 낚시의자를 꺼내 앉았다. 지나는 차들의 소음과 배기가스가 섞인 먼지가 심하다. 창턱을 보니 쌓인 먼지의 결이 다르다. 강변 초소는 흙먼지였는데 여긴 검은 먼지다. 동료가 아는 주민이 전화를 걸어 평소 초소 근무자는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매연과 먼지 탓이다. 점심시간 지나 유난히 더워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소나기가 쏟아진다. 전용도로 아래 초소는 우천과 무관하다. 도로 양쪽 밖의 아스팔트가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멀거니 건너편 여름꽃 흐벅진 굽잇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십 년 전 여름엔 조림지 풀베기를 다녔다. 영림 작업단에 들어가 울진 성류굴 식당촌 모텔에서 먹고 자며 동해안 내륙의 산림작업을 했다. 단원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한마을 출신이었다. 아저씨, 삼촌으로 연결되니 조카는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왔다. 나만 이밥에 보리알 끼듯 고향이 달랐다. 고향만 다른 게 아니라 말도 생각도 달랐는데 일하면서 점점 그들과 한통속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산림작업은 간벌과 벌목작업, 조림, 지존(地存), 만경(蔓莖), 풀베기[下刈] 작업 등인데 계절과 임상(林相) 여건에 따라 다르다. 간단히 예를 들면,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조림) 어린 나무가 사오 년 자랄 때까지 풀베기(예초작업)를 해주고, 나무가 십오 년 이상 되면 간벌작업에 들어간다. 등칡이 자라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면 줄기를 끊고 생장점을 죽이려고 글리포세이트액을 바르는 만경 작업을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목재용으로 쓸 나무가 되면 벌목하고 지존 작업으로 조림 전 준비작업을 한다. 나무도 사람처럼 태어나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작업이 수반된다. 중간중간에 솔잎혹파리, 재선충병 등의 피해를 예방하기도 감염목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며 목재로써 이용가치가 없는 나무는 톱밥을 만들거나 화목용 땔감을 만든다. 숲의 구성체인 나무는 인간과 마을 주변에 공생하면서 목재 이용, 임산물 생산, 휴양, 풍치와 홍수 피해를 예방하는 중요한 생태 자원이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나무는 가로수나 조경의 중요한 자원이다. 도시를 떠나 시골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산에서 밥을 벌었다. 숲 가꾸기 공공근로와 영림 작업단에서 일하다 수목관리로 조경 일까지 하게 되었고, 틈틈이 딴 수목 자격증이 세 개다. 그러나 숲에서 밥을 버는 일은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사람이 일생 동안 하는 일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통계에는 대여섯 가지라고 한다. 그것도 IMF 이후 가짓수가 늘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구를 건사하고 살아남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나라에선 실직하면 새로운 직업을 찾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의 실업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짐을 의미한다. 집을 팔거나 줄이고 엄마는 일을 나가고 아이들은 알바를 하거나 해서 급기야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그런 사회에서 남자는 다양한 삶의 경험을 타의로 하는 수밖에 없다. 요즘은 일과 역할에서 남녀 구분이 사라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정의 경제는 가장의 몫이었다. 아이들 커서 흔들리는 독립을 했어도 가난은 떨어지지 않았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구조적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정신 승리를 다지기엔 국량이 협소한 필부의 짐이 무겁다. 나는 지금 일이 싫고 쉬고 싶다. 핀둥거리며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아내의 잔소리가 그렇고 머지않은 냉엄한 말년의 미래가 그런 것이다.


숲으로 이루어진 삼림은 생태 자원이다.

자연 자본은 일회성 소비 대상이 아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힐은 「자연 자본」에서 환경을 보호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루려면 자연을 경제적 자산과 동일한 자본으로 즉 자연자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분별하게 파괴하지 않고 신중하게 보호하고 관리하게 되므로 자연은 미래 성장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맹목적인 GNP 성장에 매달리지 말고 '녹색 국민소득'이라는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처럼 생태 자원이 남획, 파괴된다면 지구와 인간 마을의 미래는 암울하다.


햇볕 눈부신 날 예초기 엔진에 휘발유와 물병을 얹어 묶고 골짜기로 올라간다. 간밤 열대야로 잠 설친 눈에 핏발이 섰다. 밥을 대놓고 먹는 성류굴 식당에서 물 말아 억지로 세 공기를 먹었다. 밥심이 없으면 허기져 산등을 넘기 힘들다. 입맛 없어도 세 그릇은 채워야 오전 일을 해낸다. 첫날 밥 조금 먹고 산에 올랐다가 죽는 줄 알았다. 임산 도로가 끝나는 곳에 트럭을 세우고 조림지로 올라가는 길은 고역이다. 조금 디뎠을 뿐인데 숨은 턱에 차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가져온 물을 마시자거나 하는 사람은 없다. 오전 내내 솔개그늘 한 점 없고 물 없는 조림지 풀베기 작업에서 물은 아껴 먹을 생명수니 말이다. 오늘 벨 곳은 소나무 조림지 3 정보다. 구천 평 정도면 오전에 해치워야 한다. 임지에 도착하니 작업복 상의는 땀으로 후줄근하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붕붕 시동 걸고 풀을 벤다. 날 선 예초기 날이 돌아가며 풀 모가지 댕겅댕겅 잘려 나간다. 돌이 튀고 아카시나무 어린 가지가 날아다닌다. 예초기 작업은 최소 이십여 미터씩 떨어져 작업해야 안전하다. 동료의 예초기 날에 무기로 변한 돌과 나무가 날아온다. 각반과 보안경으로 무장한 동료가 있지만 거개는 땀 때문에 벗어놓고 작업한다. 머리에 땀 많은 나는 수건을 쓰고 일한다. 기름 떨어질 때까지 한 파수 돌면 수건은 이미 땀에 젖고 만다. 비틀어 짜고 돌려 쓰고 계속 밀고 나간다.


사십오도 경사의 비탈에서 한 쪽발로 버티며 풀 베던 동료가 소리치며 달아난다. 땡삐야, 땡삐! 근처에 있던 동료도 멀찍이 도망친다. 여름 풀베기 때 자주 만나는 건 벌과 뱀이다. 눈앞에 벌이 보이면 두 손 털고 달아나는 게 제일이다. 땡삐(땅벌)는 물고 쏜다. 옷에 파고들어 물기 때문에 땡삐를 만나면 무조건 달아나야 한다. 물속까지 쫓아온다는 땡삐에게 쏘이면 산정이나 들판에 나가 속옷만 남기고 옷을 뒤집어 털어야 한다. 나도 한 번 스무 방 이상 쏘인 적이 있다. 옷을 벗고 터는데 오한이 들었다. 오줌 눌 때처럼 순간적으로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산에서 작업하다 보면 산짐승을 자주 본다. 충청도에서 풀 베는데 동료가 새끼 산토끼 세 마리를 안고 왔다. 놔주지 그랬냐고 했더니 귀여워 집에 데리고 가서 키운단다. 희귀 야생초, 약초 등을 마당 화단에 심는 이를 본다. 산에서 즐기던 걸 집에 앉아 즐기겠단 심사다. 모두 즐기는 걸 혼자 독차지하겠다는 심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팔다리를 잘라 거실 화분에 심는다면 어떤 마음일까. 서해 남해에 사는 토종 돌고래 상괭이는 보호종이라 포획을 금하고 있다. 다만 그물에 걸려 혼획(混獲)되었을 경우, 팔아도 된다는 규정인데 일부 어민은 이 규정을 악용해서 일부러 잡아다 판다고 한다. 그러고선 그물에 걸려 나왔다고 하면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존강의 민물 돌고래 '보토'는 개체수가 급감했고, 양쯔강의 민물 돌고래 '바이지'는 멸종이 공식 선언됐다. 상괭이는 개체수가 급감해 우리나라 근해에 만 오천여 마리가 산다. 잘못을 저지르고 '몰랐어요'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 후 산토끼들은 끝이 좋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소나무 순 치기 작업, 간벌 등을 하다 새끼 고라니, 알을 품은 채 둥지를 떠나지 않는 어미 새, 고슴도치, 날다람쥐 등 숲에서 만난 야생동물은 생긴 그대로 생태고 자연이다. 간섭하거나 죽이는 건 스스로의 목을 죄는 행위다.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 일자리를 구했다.

산지가 83%인 B군은 산과 관련된 기간제 일자리가 더러 있다. 산불 감시원을 세 해 했고, 새로 생긴 휴양림 관리 일을 일 했다. 지금 하는 감염목 무단이동 감시초소 근무원 일은 연말까지 한다. 그 외에 산림 병해충 예찰원, 공원 관리인, 환경 감시원 등이 있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얼마나 할지는 모른다. 나는 준비만 되면 집을 떠날 생각이다. 맨날 준비만 하다 고꾸라질지는 알 수 없으나 독거인으로 살겠다는 의지는 확실하다. 가족을 고정된 생각으로 바라보면 사랑과 행복이라는 장밋빛보다 고통과 불행이라는 인식이 떠오른다. 떨어져 행복하다면 떨어지는 게 맞고 함께 살며 불안과 불편을 감수해도 행복하다면 같이 살아야 할 거다. 난 드나드는 쪽이니까 언제까지 경계인으로 살고 싶다. 경계인은 양쪽과 너머를 바라보고 인식을 확장한다. 숲과 도시를 드나들면서 공생을 꿈꾸는 건 경계인의 몫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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