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 (41)
오늘부터 본격적인 불더위란 예보다.
서울이 33도, 안동이 32도다. 정오 가까우면서 더위가 슬슬 실감 난다. 초소 안의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뱉으며 돌아가고 동료는 오늘도 땡볕 아래 걷기 운동이다. 초소 건너 잣나무 가로수가 햇볕에 반사되어 바늘잎이 하얗게 보인다. 아카시나무 그늘에 세워둔 차는 오르는 기온을 얌전히 견디는 중이다.
작년에 뜨거운 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무리를 보았다. 더운 나라에서 왔어도 더위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모자 속의 검은 얼굴 위로 땀이 줄줄 쏟아졌다. 통계에는 경기도 외국인 노동자의 60%가 비닐하우스나 가건물에서 생활하며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난다고 한다. 여성 노동자가 동사한 이후 주인은 cctv를 달아 노동자의 움직임을 감시한다. 인권을 착취하고 모은 부는 정당한 재물일까. 열악한 주거를 선심처럼 제공하고 급료에서 꼬박꼬박 떼는 월세는 새로 지은 원룸 수준과 맞먹는다. 노동을 착취해서 번 돈은 도둑질한 재물과 같다. 가난한 나라 노동자의 형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함에도 농촌 일손 부족이란 명제에 외면당하고 만다. 노예 노동 소식을 들을 때마다 노예란 인권에서 벗어난 상태란 걸 느끼니 사회의 부문마다 불합리한 상태는 널리고 널렸음을 알겠다. 더운 날 추운 날 가려 일할 수 있다면 날씨로 인한 노동의 고통은 덜하리라.
열한 시 되자 땀이 목덜미로 배어 나온다. 엉덩이에 땀이 차 플라스틱 의자로 바꿨다. 눈부신 길 위에 흙먼지가 날린다. 에어컨 틀고 창문을 꼭꼭 닫은 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부연 하늘에 구름이 맥없이 떠 있다. 푸른 벼의 종아리가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성한 기운으로 잎을 키우는 고구마밭은 진초록 물감으로 덮였다. 생강밭 너머 시들한 감자 줄기는 수확을 앞두고 고꾸라졌다. 땅이 마르면 주인은 감자를 캘 거다. 올핸 감자 값 헐하고 굵단다. 이삭 줍기는 시골의 쏠쏠한 재미 중 하난데 인색한 주인은 수확이 끝나자마자 밭을 갈아엎는다. 어느 해 배춧값이 폭락했다. 밭떼기로 계약한 중간상인도 두 손 든 처지라 밭에서 잘 큰 배추가 늙어갔다. 인심 좋은 주인이 사발통문을 날렸다. 근동의 밭 없는 사람들 달려와 배추를 뽑아갔다. 나도 끼어 그 해 김장을 무사히 마쳤다. 밭 만들어 모종 심어 정성 들여 키운 농부의 손해에 미안해하면서 배추를 뽑았다. 배추는 자박한 물기를 머금고 노란 속살을 드러내며 잘려 나갔다. 폭격 맞은 듯 손길이 지나간 배추밭에는 스산한 초겨울 바람이 지나갔다.
태어날 때부터 차별 딱지를 붙이고 태어난 사람은 차별로부터 내내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의 출생이 그렇다.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내면화된 차별 의식을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채 살아간다. 차별은 구조적이어서 쉬 물러서거나 깨지지 않는다. 차별은 내리 물림 하며 계층 간의 차별을 낳고 차별을 단단하게 구축한다. 성별, 신체부터 출신지와 가문, 학력과 실력의 차이는 차별로 이어진다. 부족 국가 이전의 공동체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다수와 소수의 차별이 없거나 미미했다.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상호부조의 원리가 공동체의 안전과 지속을 가능하게 했다. 소유의 개념이 생기고 이방인, 국가가 생기면서 공동체의 관습법은 국가의 성문법으로 바뀌면서 경쟁과 싸움이 발생했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인식의 토대는 차별을 가시화하고 계급화하는 거였다. 전쟁 포로는 노예가 되었고 소수의 귀족 사회가 인민을 지배하고 다스렸다. 현재는 자본과 국가 권력이 시민을 지배한다.
점심 먹고 그늘 찾아 쉬는데 바람 통하지 않아 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정돈 윗길이다. 땀을 문지르며 초소로 오자 동료는 다른 그늘을 찾으러 나간다. 두 시 가깝자 기온은 절정에 이른다. 초소 밖으로 피할 데 없어 달궈진 컨테이너 초소에서 버티기로 한다. 선풍기는 시원한 바람 대신 덥혀진 공기를 뿜어내며 돌아간다. 캐리어백을 지붕에 올린 차가 달려온다. 코로나 이후 개별 캠핑이 대세라 캠핑 장비를 싣고 다니는 차가 자주 보인다. 아무 데나 풍경 좋은 곳에 멈추면 그 자리가 캠핑장이다. 덥다 덥다 하면 여름도 절로 지나겠지만 더위의 중심에 닿기 전 엄살이 심한지 모르겠다.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낫다. 땀구멍마다 물집 잡히도록 태양 아래 풀을 벴다. 충청도 강원도 오가며 풀을 벴는데 저녁마다 허연 소금버캐가 앉은 작업복을 빨아 널었다가 다음날 아침 꿉꿉한 채로 입고 나가면 마르다 땀과 함께 도로 젖곤 했다. 그래도 일할 수 있는 형편에 감사하며 망초꽃 모가지 댕겅댕겅 날렸다. 밤이면 널브러진 풀들의 주검에서 비린 풀 냄새가 났다. 꼬박 십오 년을 여름이면 예초기를 등짝에 붙이고 살았다. 그래도 가난은 떨어지지 않았다. 자본은 딱 먹고 살만큼만 주었고 잉여는 차단했다. 여축 없이 퇴직하고 말았다.
젊은 야당 대표는 공정을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설삶은 말대가리 같은 공정이다. 그의 젠더 감수성과 통일관, 사회관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 공정과 젠더, 통일관에 차별 인식이 도사린다. 실력껏 쟁취해서 산다면 다윈주의의 적자생존과 다를 게 무언가. 우성 인자가 살아남는 사회에 연대는 설 자리가 없다. 늙은이 노망과 젊은 놈 지랄은 몽둥이가 약인데 어떨지 모르겠다. 늙은 것들이 하도 전망 없는 지랄만 해대니 청년 대표가 나온 거다. 그건 여당도 피해 갈 수 없는 대목이다. 말을 실천하는 후보를 찾아본다. 더위와 정치가 비벼지니 먹을 수 없는 비빔밥이 됐다. 덥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다나킬 평원의 소금 캐러번에 비하면 서늘할 지경이다. 다나킬에서 낙타는 평생 소금 짐을 나르다 사막에서 말라죽는다.
모든 가능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상호 부조하며 DNA를 이어온 원시 공동체의 연대를 믿는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의 본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 행위로써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건 불가능한 꿈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라고 말했다. 달궈진 초소를 빠져나와 건너편 풀밭에 낚시의자를 펴고 동료와 나란히 앉았다. 가슴에 고인 땀이 넉넉한 뱃살을 타고 흐른다. 코앞으로 차들이 씽씽 지나며 바람을 일으킨다. 좀 시원해진다. 세상도 바람처럼 덥지 않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