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나는 나다', '나다움을 찾아 나답게 살겠다', '나의 정체성을 찾아서...'라는 말을 하고 듣는다.
나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산물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나를 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그래서 '타자는 나의 얼굴이다'라는 말은 맞다. 나는 욕망을 지닌 존재지만 내가 지닌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며 사회가 욕망하는 것들을 욕망하도록 설계된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사는 존재다.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 돈오(頓悟)의 성찰도 실은 선인의 깨달음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와 사고는 인류의 역사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된 사고다. 다만 사고와 행위 중에서 반인간, 반생명의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는 각성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매번 반성과 뉘우침을 되풀이하며 절망하지만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관성을 지녔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소중한 특질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우연한 개인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수많은 맥락이 존재한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역사와 문화다. 어느 지역에서, 또는 한 나라의 환경을 덮어쓰고 태어난 사람은 독특한 역사와 문화의 환경에 속박된다. 그가 받은 교육과 무의식 중에 배우고 습득한 관습과 공동체의 형질은 일생을 좌우한다. 예전엔 그것을 혈통과 연결시켜 민족성의 동일체로 보았다. 현대는 다양한 인종이 지역을 옮기며 섞여 산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실의 생존 방식에 어울리지 않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과 경험을 요구한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사냥터에서 개인은 '나'를 찾기도 전에 자본에 포획, 포섭되어 포박당하는 삶을 살아간다. 국가는 평온한 일상의 평화를 지켜주겠다며 안전과 통제의 당근과 채찍으로 의무를 강요한다. 원시 동굴에서 들판을 질주하는 더 이상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그때의 인간조차 삶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쉴 새 없이 낙원과 지옥의 유혹에 시달려 왔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 나이 들어간다.
피터팬 신드롬은 '어른'에 대한 공포다. 단순한 불안이라기보다 알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과거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어른은 얼마나 불안한 존재인가. 고통을 회피하는 현상은 어른들이 꾸며놓은 세계에 대한 혐오다. 전쟁, 기아, 증오, 학살은 피터팬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윤동주를 존경한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는 '기대지 않고'란 시를 썼다.
기대지 않고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사상 종교 학문 권위는 인류의 문화 속에서 배양된 삶의 질료다.
이미 만들어진 재료는 이전의 인식 체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변화의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시인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깨달은 기성의 토대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기성은 이미 답습되어 온 앞으로도 달고 사는 앙시앙 레짐, 기성의 사고 체계를 가리킨다. 구체제의 변화는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혁명을 선택하기보다 '기대는' 것을 선택한다. 기대는 건 멈추는 것을 의미하지만 관조를 뜻하기도 한다. 관조는 대상의 양태를 분석, 해석하는 행위다. 현실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를 알아챈 다음의 행동과 사유는 무엇일까. 시는 정답을 내놓는 장르가 아니다. 현실 분석의 직관을 노래한다. 분석의 결과는 서늘한 질문을 도출한다. 삶은 끝없는 질문의 과정이다.
재일 작가 서경식은 '인간에게 오래 산다는 게 지고의 가치일까. 평온하게 생명을 연장하면 그걸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상을 품지 않고 자기실현을 포기하고, 평균적인 삶과 평범한 죽음을 바라는 우리야말로 가차 없는 고발 대상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평범하다는 말과 보편적이다라는 말의 해석의 뉘앙스가 다르다. 평범은 행위의 유무에 관계없이 내던져진 상태라면, 보편적은 평화와 인간 존중의 세계로 향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삶의 양태와 관련 없이 '평범한 삶'도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평범한 삶이 존중받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만들고 습득하며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백세 인생을 살게 된 우리는 평범해도 고통스럽고 유별나도 고단한 삶을 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