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39)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가서 모노레일을 탔다.

올라갈 땐 소년이 낀 부부와 탔다. 6인승인데 오전이라 빈 모노 카가 레일을 따라 돈다.

군데군데 소나무를 덮은 방수포가 보였다. 여기도 소나무 재선충병이 지나갔다.


566m 계룡산 산정에는 포로수용소 통신대가 있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는 섬에 와서 수도를 했다고 한다. 불국토를 건설하려는 대사의 의지는 사나운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전파가 잡히는 곳이라 산꼭대기서 UN사령부와 무전을 교신했다. 돌벽이 남아 있는 건물은 부연 황사 바람을 맞고 있었다. 미친 전쟁의 어둠 속에서 모스 부호에 귀를 곤두세운 병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화약 냄새나는 총신을 거두고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었을까. 몸과 정신이 맥박처럼 살아 뛰는 인간의 시원으로서의 모태인 고향 말이다. 세월이 흘러 마른풀 무성한 자리에 관광객이 밀려드는 현실을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혼자 다니는 게 일상이 되니 소소(蕭蕭)한 기분이 든다.

몰사(沒死) 하지 않는 담에야 죽음은 개인의 체험이다. 죽어서 홀로 떠나니 살아 연습이 무슨 대수냐 싶다. 가끔 낯선 풍경을 대할 때 식구들 생각이 난다. 아이들 어릴 때 나들이 가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젠 그들도 독립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난 쓸모없이 내면의 바닥을 긁는 심정으로 독거(獨居)에 들었다.


내려갈 땐 칠십 전후의 부부와 칠십 초의 남자 둘과 탔다. 둘은 친구인 듯했다. 그들은 예전 기억을 얘기했다.

공원 뜰에 홍매화가 피었다. 아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적 공원에 모여 서성인다.

회전목마와 흔들 그네, 점핑 타워, 매점이 있는 모노레일 승차장 주변에 가수의 노래가 흘렀다. 남의 노래를 부르는 짝퉁 가수는 부드러운 열창을 했지만 귀에 거슬렸다. 그의 노래를 폄하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 쓸모를 다한 나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난 무늬만 살아 있는 싸구려 옷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소 전시물은 사 년 전에 봤으니 낡은 수용소 건물을 찍으려다 매점 옆의 4D 영화관 상영 시간이 12시라 기다려서 보기로 했다. 제목은 '캠프 넘버원 거제도 포로의 일상'이다. 놀이 광장의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관으로 내려갔다. 아까 두 남자도 보인다. 입구에서 안경을 나눠주었다.


영화는 삼십 분짜리였는데 실망스러웠다.

제목도 스토리도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 러닝타임이 두 시간 짜린데 거두절미해서 토막 낸 것 같았다. 시작은 괜찮았는데 주인공이 죽자 관리인이 화면 끝에 나타나 불을 켰다. 상영이 끝난 거였다.

'서울에서 유학하던 두 주인공은 황해도 고향에 갔다가 인민군에 징집된다. 전투 중 포로로 잡힌 둘은 토드 준장 납치사건 와중에 탈출 도중 사살된다'.

이것이 줄거리의 전부다.


도드 준장 피랍사건은 1952년 5월 7일부터 6월 10일까지 고현리에 있던 제76 포로수용소에서 일어났다. 당시 수용소는 포로들이 이른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갈라져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다. 공산포로 측은 도드 준장을 인질로 삼아 포로 대우 개선,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방침 중지, 포로 대표 위원단 인정 등을 요구하며 유엔군과 대치하는 한편 반공포로를 인민재판에 부쳐 처벌했는데 사건이 일어난 약 한 달 동안 죽은 반공포로만 105명에 이른다.


이북에서 떡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포로수용소에 찾아와 철조망 너머로 아들을 찾는 일은 이념을 떠난 혈육의 감정을 호소했다. 하지만 삼십 분의 내용에 전쟁의 맥락과 평화에 대한 줄기는 담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극장 앞 평화기념관에는 사르트르의 말이 쓰여 있다.

'부자들이 전쟁을 선언하면 죽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When the rich wage war, it's the poor who die).


남과 북에도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난 젊은이가 있었다. 흩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의 고통은 좌우 남북을 가리지 않는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은 좌우 대립의 혼란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남쪽의 민중은 군경에 의해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

한국전쟁 중에 국군은 통비 분자를 색출한다는 빌미로 주민을 학살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국군(11사단 9 연대 3대대)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부터 3일간 거창군 신원면 박산‧탐양‧청연 골에서 14세 이하 어린이 385명을 포함해 양민 719명을 통비 분자로 몰아 집단 학살한 참극이다. 이 중 14세 이하 어린이가 385명이었다.

주민을 꼴짜기로 몰아 총질을 해댈 때 한 청년이 외쳤다.

'세상에 국민을 총으로 쏴 죽이는 나라가 있단 말이오!'

그도 총탄에 쓰러졌다.


국가는 제도와 이념으로 비국민을 가려내 소거했다. 한일병탄 전후 구한말에는 동학군을, 항일 의병을 토벌하고 죽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황국신민과 불령선인을 가려 투옥하고 고문, 학살했다. 식민기의 치안유지법은 국가보안법으로 무늬를 바꿔 오늘에도 공포의 무기로 작동한다. 해방 후에는 좌우로 갈려 서로의 가슴에 죽창을 찔러댔다. 이후의 정권에서 체제에 저항하는 시민은 감시와 통제, 투옥과 처형의 대상이었다.

강대국의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데다, 패권 주도의 전쟁터로 변한 한국의 상황을 누가 대변한단 말인가.

오늘까지도 이념의 패러다임은 안팎으로 시민의 정신을 옥죄인다. 급기야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검열하기에 이를 정도로 사상은 내면화된 트라우마가 됐다.


섬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당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은 뜻있는 지식인이라면 새 세상을 여는 신 사상이었다. 톨스토이의 휴머니즘과 P.A. 크롯폿킨의 상호부조론, 아나키즘은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는 탈출구였다. 신채호, 이영회 선생, 박열 등은 무정부주의자였다. 섬의 윤일, 신용기, 지한명 등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 단체를 이끌고 독립 투쟁을 했으나 사상을 이유로 유공자 인정이 불허되다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해방 후 조국에 돌아온 항일 의열단의 단장 약산 김원봉이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잡혀 심문 도중 뺨을 맞는 일까지 벌어졌다. 약산 선생은 분함에 옥중에서 사나흘 분루를 토했다. 이후 선생은 월북한다. 이데올로기는 유통기간이 있는 식품과 같아서 쓸모가 다하면 폐기되는 운명이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의 자유는 명문의 허울에 불과한가. 우리는 언제든 비국민으로 제외되는 저울대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불안한 존재다.


대선 후보가 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를 들먹여 핵무장, 선제 타격을 외친다. 역사에서 겪고도 배우지 못한 무지의 결과다. 언제까지 전쟁의 공포를 이용한 표팔이에 넘어간단 말인가. 체제의 지배 효과는 단순한 인간상을 표준화하여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동일화돼 타자를 일률적으로 적대시하는 데에 기여한다. 혐오는 반대를 넘어서 생사여탈을 좌우하기에 이른다. 싫거나 미우면 사회에서 배제되고 비 국민화하는 것이다. 이럴 때 국가는 악몽이 된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서 모를 수 있다.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에 와서 선대의 고통과 상처를 떠올리는 게 모호하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과 전쟁을 초래하는 무사유를 반복해선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 등을 돌린다는 건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 전제를 잃어버린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엄혹하고 문학은 시시하다'는 말처럼 사냥터가 돼버린 일상에서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행위는 각자의 취미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밥벌이의 냉정함을 헤쳐나가는 현실에서 역사는 사라진 사람들의 공허한 흔적이라고 구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구경'은 목격자나 증인이 아닌 방관자의 자세다. 현상에 개입할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방관자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절망에 빠져 실패하리란 걸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섬을 관통하는 길을 달려 서쪽에서 동으로 넘어왔다.

집에 돌아오니 TV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하고 있었다. 엎드려 책을 폈으나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고 코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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