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분다.
일상에 불편을 느끼는 정도다. 태풍처럼 집과 사람을 휩쓰는 정도는 아니니 살아가는 데에 큰 장해는 아니다. 적당량은 화학의 비율처럼 애매모호한 분량이다. 수치로 계량화한 무엇도 삶을 자로 잰 듯이 재단할 수는 없다. 욕구는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사라진다. 욕망은 하고자 또는 얻고자 하는 대상의 가늠치가 불명확하다. 욕망은 채워지면(그렇다고 느끼면) 다른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마치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쫓아 끝없이 숲을 뒤지는 행위와 같다. 인간의 삶은 양과 질을 측정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인간이란 상황 판단의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삶을 변화와 성장으로 이끄는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양 서원 앞에서 밥을 먹었다.
즉석 미역국 끓여 점심을 먹을 참이었는데 바람이 불어 도시락만 먹었다. 김장김치만 있어도 꿀맛이다. 끝물 더위 버티고 가을의 서늘한 기운에 익은 무 배추는 제 몸 스스로 단맛을 지닌다. 무김치는 똑별난 양념 없이 무뚝무뚝 베어 먹어도 맛있다. 서원의 기와에 갈볕이 따사롭게 퍼진다. 솟을대문에 진덕문(進德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렸다. 덕으로 나아가는 문. 수많은 유생이 입신양명의 이상을 품고 공자왈 맹자왈 학업과 덕성을 닦던 곳이다. 그 시절의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수신제가하고 치국하면 천하가 평화롭다는 유학의 가르침은 국가의 존립과 백성의 안녕에 진정 기여했을까. 파쟁과 외침을 겪은 역사를 톺아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났다. 인민은 탐관오리의 전횡으로 목숨을 잇기가 어려웠고 잦은 외침은 강토를 피로 적셨다. 임란 후 징비(懲毖) 하지 못한 서애의 징비록은 붓대와 입방아질로 날밤 새던 국정 앞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백 년의 역사를 꿰고도 지금의 질펀한 삶의 과제는 어떤 화두로 헤쳐나갈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코나투스는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힘, 내지 의지를 말한다. 일체의 선과 악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나(개별자)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뜻한다. 정권을 갈아치워도 머언먼 경제민주화와 칠십 년을 동강 난 채 대치한 분단체제에서 대중의 삶의 기준은 어디로 향하는가. 계층 간 욕망의 서열화는 한국전쟁 이후 군사독재를 거쳐 오면서 굳어졌다. 내 가족만 돌보는 근친 공생의 욕망은 진보도 보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자와의 연대, 지속 가능한 상생의 공동체는 균열을 넘어 터지기 직전이다. '코나투스(욕망)는 결코 불변의 이데아와 같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란 의미다. 코나투스의 방향이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할 때 판단은 유보되고 공동체는 멈춘다.
범박하게 말해 제도 교육은 국가주의적 가치를 불어넣는다. 국가, 공동체가 원하는 인간상을 키우는 교육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졸업 후에도 공부와 독서를 계속한다. 비판의식은 그렇게 길러진다. 사회의 질서와 가치에 의혹도 질문도 없는 사람은 제도 교육만으로 충분히 사회생활을 한다. 공동체의 가치와 자신의 지향을 대입하면서 삶을 엮는다. 인문학의 요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삶에 대한 질문이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로부터 전쟁, 범죄, 가난 등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살피고 현재의 제도와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의혹과 전망을 고찰하는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철학과 역사, 문학과 과학, 예술의 통섭적인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한 번뿐인 삶의 도정에서 배부른 돼지로 살다 가기보다 배고프지만 세계의 유의미를 짚어 나가는 게 생명이 가진 권리이자 축복이기 때문이다.
무사유로 일생을 사는 사람은 무모하다. 평범하게 살아도 치열한 싸움터인 세상에서 세계의 '개별자'인 개체로 사는 인간의 방향과 갈래는 얼마나 다양한가. 보편적 인간의 가치란 게 어느 때나 정설이나 진리가 아닌 것처럼 인간의 사유는 공동선을 향한 가치에 머무른다. 정체가 아닌 변화와 성장을 추동하는 가치로서 말이다. 때문에 사유는 멈추거나 끊어버리는 행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계를 보는 인식의 전복이 수반되지 않으면 인간은 '보는'것만 본다. 인식 체계의 변화에 따라 숨은 대상이 '보이며' 삶은 성장한다.
투명한 하늘이 높다.
거두지 않은 배추밭 한쪽은 허리를 동여맸고 한쪽은 풀어헤친 채다. 이맘때 시골은 김장 퍼레이드. 주말이면 골골이 집집마다 미끈한 자가용이 들어서고 절인 배추 치대고 마당 걸 솥에 수육 삶는 김 오르고 왁자하다. 근동 타처에 사는 자식은 김장을 돕고 부모가 거둔 가을을 바리바리 싣고 떠난다. 먹을 것 내주는 부모 품은 비어도 흐뭇하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자식에게 내준다. 고목처럼 말라 비틀린 손으로 밭고랑 기어 다니며 따 말린 고추, 돌담 아슬하게 딛고 거둔 감, 콩팥이며 자잘한 봉지에 서푼서푼 노나 담아 골고루 싸 보낸다. 도시 놈은 시골의 풍경을 보며 느낀다. 인정은 인척 반경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 뿐, 확장성은 띠지 않는다. 질기고 연속적인 근친 공생애의 관계는 외부의 접근을 꺼리고 차단한다. 입시철이면 사찰과 기도원에서 백일치성을 드리는 부모의 풍경에서 그것을 본다.
사람살이의 내막은 예나 제나 칠정(七情)의 틀 안에서 벗어나기 쉽잖다. 인간의 본성은 고래로부터 인생을 궁구한 철학자에 의해 설명되었지만 삶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문명과 문화를 달리해도 어슷비슷하다. 국가와 민족의 형성 전후 역사의 맥락은 독특한 인간의 감정을 형성한다. 희로애락 애오욕의 감정은 질박한 일상에서 나타난다. 완벽이란 우주의 탄생에서조차도 틈입하지 않는 관념이다. 말 그대로 개념일 뿐. 우주와 함께 인간은 변화와 성장의 삶을 살다 끝난다. 우연한 탄생과 우연한 적멸의 연속이다.
사과 따던 사람 집으로 돌아갔다.
빈 들판 빈 밭엔 몸을 털고 쭉정이만 남은 깻단 수북하다. 찬바람을 맞고 달빛 이슬에 젖어 영혼마저 쇠잔할 무렵 뉘 집 군불로나 들어가면 존재는 다한다. 사람 외의 것들은 사람의 소용에 따라 생사를 달리해도 제 난 몫은 하고 간다. 머리 검은 것들이 함부로 살다 간다.
*인용「인문학 데이트」 김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