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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의 숲 Nov 18. 2017

<23> 디톡스 타이페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곳에 온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적응이라는 명목 아래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진짜 타이페이에 있구나,실감한 순간 길을 잃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는데 동시에 어디에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었다.


  휴식이 간절했다. 삶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벅찼다. 차곡차곡 쌓이는 온갖 경험과 시간의 덩어리들이 소화되지 못한 채 쌓였다. 소화장애로 더부룩해진 마음은 <타임!>을 외쳤고 독소들을 분해할 디톡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휴식 같은 것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선택지에 불과한,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많다. 오늘도 10시간을 꼬박 일해야 하는 엄마만 떠올려도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임을 안다. 그 행운과 함께, 그동안 나름 열심히 모은 적은 자본과, 제일 안전한 학생이라는 신분까지 갖춘 채로 이곳에 왔다.


  기대만큼 이곳에서의 생활은 여유로웠다.

매일 목적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로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마음껏 길을 잃어도, 연신 실수해도 아직 해는 중천에 걸려있었다. 시간의 제약이나 꾸지람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다 버스를 놓쳐도 지하철 역을 헷갈려 10분을 낭비해도 하루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를 엉망진창으로 사용해도 일상은 멀쩡하게 굴러갔다. 서울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 길어지니 마음은 다시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마음은 이렇게 물었다.

삶은 누군가에겐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축복이지. 반복되는 매일을 하나의 커다란 의미로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 아닐까?


나는 항의했다.

삶을 어떤 의미로, 어떤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고민하고 악착같이 매달려야 할 때가 있는 걸? 그냥 하루를 흘려보내면 안될까? 그 무엇도 지금은 열렬히 사랑하고 싶지 않아. 살뜰히 신경쓰고 싶지 않아.


  마음의 이러한 불평에 타이페이에서의 하루들은 불현듯 무의미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마음의 설득에 넘어간 나는 하염없이 불안해졌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통달한 현자라면 한 번쯤은 했던 말이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며 깨달았고, 그 유명한 고전 대학에서도 이야기한다. 다소 식상하고 어딘가 꼰대같은 이 진리를 타이페이에서 온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내 마음이 타이페이에서의 날들을 디톡스의 시간, 내 세상이 넓어지고 있는 시간, 그저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추게 된 시간, 미처 몰랐던 나의 긍정적인 면모를 발견한 시간들.이라고 규정했을 때 이 시간들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타이페이에서의 날들을 쓸모없는 시간, 비 생산적인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한심한 시간, 나중에 후회가 될 시간, 돈만 쓰는 시간들. 이라고 규정하니 그런 시간들이 되었다.  


  정말로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 물론 마음을 "잘" 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 오늘의 날씨, 주머니 사정, 행복한 유년 시절, 든든한 사람들, 좋은 공기와 푸른 하늘의 역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 진리를 깨닫고 나니 삶의 공식이 다소 단순해진 것 같아 한결 편해졌다. 어딘가 새로운 종류의 자신감도 생겼다. 내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그러므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나!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 내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내 안에 있고, 나는 나 자체로도 온전해질 수 있으며, 내가 괜찮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괜찮다! 자의식 과잉의 꽤 위험한 자신감이지만 또 막막할 때면 곱씹어 보리란 것은 분명하다.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알아가고 있고, 내 세계는 , 나는 괜찮을 것이다! 안개같이 뿌연 타이페이의 오늘들도 지나고 나면 또렷하고 반짝거리는 사무치게 그리워할 시간들이 될 것이다!


: 마음 디톡스를 도와주는 타이페이의 정경

해가 지는 단수이는 언제나 옳다.
여유있는 하루의 상징과도 같은 느지막한 브런치
밤의 캔버스에 덧칠한 물감같던 구름
엄마와 딸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나를 약하게 만든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났던 맑게 갠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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