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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Mar 28. 2024

떠남과 머무름의 사이, 코펜하겐에서

-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그리는 궤적이 여릿하게 보일 만큼, 연회색의 벽돌 바닥을 조금 더 짙은 색으로 칠할 만큼, 딱 그만큼만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는 사람과 겉옷에 붙어 있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는 사람이 절반 정도, 딱 그 정도.


 코펜하겐은 두 번 갔다. 두 번 모두 짧게 머물렀고, 비가 내렸다. 교환학생으로 덴마크에 가 있던 D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지금도 D를 만난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는 깡마른 체격에 빛나는 눈을 가진 '살아남은 사람' 같이 보였다.      


 D와 난, 각자 덴마크와 한국에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살고 있다는 모습을 서로에게 글로 남겼다. 행복해 보이는 그의 미소를 사진으로 보며 나의 힘듦이 드러나지 않기를 잘 눌러 담았던 그때, 내 마음이 가난했던 시간이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마음에 강렬한 무언가 가득 찬 것 같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서 그런가.

     

 코펜하겐은 도착지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파리로 가는 길,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저렴한 항공권을 구하느라 경유가 있는 것을 샀고 그 경유지에 코펜하겐이 있었다. 대기시간이 길어서 잠시 공항 밖에 나가서 근처에 짧게 들를 수 있는 성을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뜰에 있는 보랏빛 꽃들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음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다시 만날 일상을 마주하는 준비도 해야 했다.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와 불안함 속에서 방황했던 것 같다. 그때 황보름 작가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었다면 그 불안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텐데. 민준, 영주, 승우의 모습을 보며 가난했던 내 마음이 조금은 채워졌을 텐데. 


 요가로 심신을 다스리며 바리스타로 일하는 민준, 번아웃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서점을 하며 일에 대한 의미를 찬찬히 살펴보는 영주, 자신이 좋아했던 일에 지쳐 좋아하지 않는 일로 옮기고 취미로 시작한 일로 새로운 삶(작가)을 살게 된 승우.      


 작가는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일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나의 어깨를 따뜻이 안아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주는 정답을 안고 살아가며, 부딪치며, 실험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안다. 그러다 지금껏 품어왔던 정답이 실은 오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다시 또 다른 정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우리의 인생.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안에서 정답은 계속 바뀐다. 

- 황보름,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2022, 클레이하우스, p.43     


삶은 일 하나만을 두고 평가하기엔 복잡하고 총체적인 무엇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불행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아닌 다른 무엇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은 미묘하며 복합적이다. 삶의 중심에서 일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삶의 행불행을 책임지진 않는다. 

- 황보름,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2022, 클레이하우스, p.462     


 난 계속 바뀌는 내 인생의 정답을 알기 위해,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가기 위해 자신만의 경유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유지. 거쳐 지나는 곳.     


 언젠가 떠나는 게 예정이 되어 있는 곳.      


 목적지에 바로 갈 수 없다면 잠시 들를 수 있는 경유지에 머물면 된다. 그곳에서 숨을 고르고 힘을 비축해서,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면, 그때 가면 된다. 어쩌면 그 경유지가 내 목적지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은 답이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니까.     


 코펜하겐, D와의 여행, 나의 경유지. 숨을 고르고 나니 보였다. 나의 리듬으로 춤을 추고 나의 속도에 맞게 나아가는, 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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