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
가을인데 여름처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서 뽀송뽀송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왔건만 프라하성을 둘러보고 나니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지난 애매한 시간, 성의 후문으로 나와서 도시 전경을 오른편에 끼고 걸어 내려왔다.
문이 열린 카페가 보이자 D는 앞장서서 들어갔다. 각자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우선 한 잔을 가득 따라서 쭉 들이켰다. 우린 목 뒤로 넘어가는 청량한 달콤함으로 기분 좋게 차올랐다.
한적한 곳에 있는 애매한 시간대의 카페 안. 나뭇잎과 바람이 부딪히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활짝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쏟아지듯 들어오는 햇살로 가득했다. 바람과 햇살과 맥주로 채워진 우린 조금 나른해졌고,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D와 난, 서로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작가 로버르트 발저가 사랑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휘어진 길에 호두나무, 벚나무, 자두나무가 매혹적인, 재미있는,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개 한마리가 길 한가운데 가로누워 있는데 길 자체,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사랑했다.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것을 매 순간 나는 뜨겁게 사랑했다.
- 로버르트 발저, 산책, 2020, 민음사, p.17-18
아마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사고 가게 앞 테이블에서 한 모금 마시면서 햇빛을 받는 상황 아닐까.
행동은 같고 장소가 다른 것일 뿐인데, 여기엔 낭만이 있고 거기엔 낭만이 없다. 자연스레 열린 창문 밖으로 시선이 갔다.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며, 일상에서도 낭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오늘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눈과 귀를 열고 나른한 마음으로 그 순간에 빠져보는 것이다.
작가 로버르트 발저에게 산책은 일상에서 느끼는 여행이었고, 사랑이었으며,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산책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산책은 말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활기를 찾고, 살아있는 세상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 마디도 쓸 수 없고, 아주 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가 없습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 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걸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고 긴 노벨레는 물론이고 아주 짧은 글마저도 쓸 수 없습니다.
- 로버르트 발저, 산책, 2020, 민음사, p.45
그는 산책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 이건 작가의 자세이기도 하다. 산책에 진심이었던 그의 글이, 조그만 즐거움을 발견하는 일상을, 글을 쓰는 자신의 삶을 사랑한 소박한 이의 고백으로 들렸다.
산책을 하는 사람은 아주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야 하고, 살아 있는 아주 작은 것, ~ 사랑스럽고 착한 학생이 처음으로 서툴게 글씨를 쓰다가 구겨 버린 종이 한 장까지도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높은 것과 낮은 것, 진지한 것과 우스운 것이 산책자에게는 똑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가치가 있습니다.
- 로버르트 발저, 산책, 2020, 민음사, p.48
프라하 시내를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광장에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광장의 돌바닥이 가로등의 주황 불빛을 반사하고 사람들의 얼굴에 따뜻한 빛을 비췄다.
프라하의 여름 같던 가을날, 잊어버렸던 우리의 낭만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