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 너는 이름 모를 형체로 내게 다가왔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이고 유치한 감정에 둘러싸여 누구도 가르지 못할 감정을 주고 갔다. 네가 부여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커져 자꾸만 내 시선에 네가 닿을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 잡았다. 타인의 존재로 나의 하루가 채워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 후로부터 조금씩 내 존재를 네게 전하고 싶어졌다. 더 크게 날 온몸으로 외치고 싶어졌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관계는 돌아보니 둘레를 형성하고 있었고 크나큰 테두리를 지어 나의 삶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앞에선 무력해진다. 아니, 무력해지길 원한다. 세포 하나하나를 잇는 모든 근육이 잔뜩 긴장한 듯 단단히 서로를 잡아당기다가 한순간에 펑- 하고 연기처럼 느슨해진다.
2
어제는 온종일 비가 오더라고요 지하철역에 도착해 5번 출구로 향하는데, 계단 앞쪽부터 사람들이 정체된 거예요. 난 정말 하늘이 열린 줄 알았어요. 매일 뉴스에 사건, 사고가 수도 없이 많이 터져요. 누군 지구 종말이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데 어젠 우리가 시대의 끝에 서 있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난 가야 할 길이 있었어요. 긴 줄을 헤엄치고 나서 폭우를 맞이했죠. 바지가 온몸에 착 달라붙은 줄도 모르고, 신발이 저 심해 같은 웅덩이에 푹 적셔져도 난 얼른 가야만 해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어요.
무사히 도착하긴 했지만, 창가에 비친 생쥐 꼴이 퍽 웃기더라구요. 만약 지금 이 모습을 당신이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하기도 했어요. 허리를 젖히며 웃어넘길까 혹여나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달려와 이리저리 손바닥 뒤집듯 날 뒤집어 상태를 확인할까 그런 상상 있잖아요.
요 며칠간 수중을 헤엄치는 기분이에요. 무척이나 습하고 가끔은 숨쉬기도 힘들어요. 그 기운이 이 장마를 만나기 위함이었다니, 실제로 마주하니까 어마어마한 기운이 나올 만했더군요. 어제를 회상하는데 궂은 날씨보다 당신만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 보고 싶어요. 또 연락할게요.
3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딱 우리끼리만, 덕분에 여름이 좋아졌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그렇게 겨울이 좋다고 입이 닳도록 외치던 나는 이제 너랑 보낼 지독한 무더움을 사랑하게 됐어. 꿉꿉한 날씨도 함께 있으면 그리 깔끔하지 않은 감정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되기도 했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도 크게 작용하지 않을 감정의 파동을 느끼고 있어.
사실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은 나 스스로 제일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나조차도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어. 일 년 중 가장 정체된 감정을 느끼던 때가 여름이었는데 덕분에 푸릇한 자연과 함께 순리를 따르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더 나에게 솔직해지기도 했어.
사계절 내내 서로에게 솔직해지잔 말이 난 가장 큰 도전이라는 걸 넌 잘 알고 있겠지. 계절의 변화가 큰 파도가 되어 내 감정을 휩쓸고 간다는 걸 알고 있는 네가, 사계절 내내 우리 온전히 그 계절을 받아내자는 말을 내게 건넸던 건 너조차도 나에게 용기를 준 거잖아.
난 그런 너를 무척이나 사랑해. 넌 늘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어. 난 너와 함께 라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마음을 먹게 돼. 무모함도 용기라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늘 나의 여름을 지켜줘. 그렇게 우리 항상 서로에게 솔직해지자. 넌 나의 계절이니까.
4
여백 없이
너의 모든 시간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