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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Dec 10. 2023

한 여름의 산타

나의 공간에 대하여-

 놓치고 싶은 순간을 위한 공간이 있다. 세상이 싫었던 아이는 책상에서 내려와 행거 아래 깊숙한 곳에 자신의 체취를 감춘다. '여긴 안전해.'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숨결만이 공기 중에 헤엄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명한 달빛 컴컴한 행거아래서 나는 이 순간을 놓치기로 한다. 내려놓기 좋은 곳, 어떤 시선도 따르지 않는 곳, 편하다 못해 잠이 오는 곳 나의 공간에서-


 퇴사 후 병을 얻었다. 지긋지긋한 불면증. 해가지고 뜨는 순간까지 현실에 버려졌다. 나도 꿈을 꾸고 싶어 제발 나를 보내줘. 꿈은 놓아버려야 할 근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그것만은 애를 쓰지 않아도 떠나지 않았다. 헤어져야 했다. 사랑에도 집착은 독이다.

근심 너는 내게 독이다.


의사 선생님은 소량의 약과 적당한 운동이 도움 될 거라고 했다. 무작정 걷기. 돌아보지 않기. 이별의 순간 깨달았다.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보며 살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했다는 것.



 첫날은 아주대 캠퍼스를 걸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 그 사이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나. 한 여름에 산책이라니 역시 이별을 미뤘어야 했나. 찌는 태양을 등에 지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듣지 말자.


캠퍼스 꼭대기에는 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있다. 여우길. 적당한 운동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 마음이 어지러울 땐 녹색 앞에 서라는 어느 작가의 말, 무거운 발걸음, 엉켜버린 생각, 주저하는 모든 것. 그렇게 커다란 짐을 안고 걸었다. 한 여름의 산타였다. 목적은 좀 다르지만.



 가파른 경사를 쉬지 않고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한껏 정갈해진 나무들이 보였다. 내리쬐는 햇살아래 일렁이는 그림자. 찬란하게 빛나는 나뭇잎들의 성대한 잔치. 그 순간 나는 왜 눈물이 났을까. <작고 기특한 불행>의 저자 오지윤 작가는 말했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고 의아하지만 알 것 같다고 했다.


‘나 위로받았구나.’


자연의 중심에서 나는 오지윤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의사 선생님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몸을 적당히 피곤하게 하면 알아서 잠이 올 거예요.'라는 의도였을 테다. 하지만 선생님은 모른다. 아마 모를 것이다. '적당한 운동'이라는 행위는 꽤나 감성적이라는 것을.


 나의 이별은 반은 성공했지만 반은 실패했다. 떠나간 근심은 가끔 옛 애인을 잊지 못하고 무심한 밤 똑똑 노크를 하고 찾아온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연을 찾는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잎사귀들의 춤사위를 구경한다. 새들의 소리를 듣는다.


 지저귀는 새들 나는 저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른다. 그저 우리는 서로를 위로한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눈을 맞춘다. 가끔은 아프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지만 자연의 중심에서 나는 또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누군가 말했다. 자신의 월요일은 짙은 남색이라고. '왜 하필 짙은 남색이야? 나에게 월요일은 그저 검은색일 뿐이야.' 그러자 그가 말했다. '검은색은 안 보인다는 핑계로 잠시 멈출 수 있지만, 짙은 남색이라 우리는 희미하게라도 나아가야 해. <출. 근>을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


오늘 밤도 근심이 찾아올 예정이다.

한여름 머물던 산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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