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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y 20. 2024

스타트업에 온 걸 환영해

이게 맞아?




면접을 보고 이틀 뒤, 나이키 매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또다른 면접 전화일까 싶어 목소리를 가듬고 서둘러 받았다.

익숙한 듯 낯선 수화기 너머 통화 상대는 지난 번에 면접을 본 기업의 인사 담당자였다.


"안녕하세요~ **씨, ***입니다. 합격하셨다는 소식 전하려고 전화 드렸어요. 

혹시 저희 회사 입사 의향이 있으신가요?"


드디어다. 

그토록 듣고 싶던 합격 통화.

첫 번째 합격 소식도 아니었건만 가고 싶던 기업의 연락이라 그런지 기쁜 마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인사팀장님께서는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으니 당황하셨던 모양, 여보세요? 라며 다시금 재차 묻는 질문에 나가 떨어진 정신을 붙들고 가겠다며 대답을 남기니 이것저것 설명해 주셨다.

나오는 날짜는 면접 당시 말했던 답변대로 알고 있으면 되냐는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조금만 더 쉬다가 나갈까... 하다가 하루라도 빨리 출근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담당자분께서는 필요한 준비물을 전화로 전달해 주셨다.

매장의 노래 소리가 너무 커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회사에서 종이컵은 따로 쓰지 않아 텀블러와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슬리퍼를 갖고 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당장에 들뜨는 마음을 잠재우긴 쉽지 않았다.

엄마와 가족들에게도 최종 합격 소식을 전달하고 당장 필요한 슬리퍼가 자취방에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주말이 지난 후부터는 나도 직장인이다.





룸메이트는 여행 때문에 집에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바로 지각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첫 출근부터 지각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알람을 30분 단위로 맞추고 잔 덕에 가장 첫 번째 알람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캐주얼한 복장을 즐기는 터라 옷을 고르려니 고민이 됐다. 

복장은 자유였지만, 그래도 첫 출근이니만큼 단정한 옷이 좋을 거 같았다. 

검정색 카라니트에 진청바지를 받쳐입고 비 오는 자취방을 기분 좋게 나섰다.

면접 당시 받았던 텀블러와 컵을 함께 챙겨나왔다. 등본이랑 통장 사본을 갖고 와 달라고 하셨는데 프린트를 하지 못해 마음이 좀 급해졌다. 사무실에 일찍 도착한 김에 공유 오피스 끝에 있는 컴퓨터에서 통장 사본을 뽑아 드리니 캡처본으로 다시 달라고 하셔서 공연히 급하게 움직인 것 같아 뻘쭘해졌다. 아침에 일찍 도착하시는 다른 개발자분께서 자리 정리랑 컴퓨터 세팅을 도와주셨고, 덕분에 첫날은 회사 계정을 만들고 드라이브에 권한 설정, 업무 일지 작성 방법 등을 공유 받았다. 







하지만 약간의 시련도 있었으니... 사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면접장에서 본 여자분께서 디자이너분이신데 결혼으로 인해 이사를 가신다고 했다. 졸지에 1인 디자이너가 된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실무 지식은 전혀 없는데 사수가 없으면 이제 누구한테 배우지..? 설상가상 8월 말이 다 돼서 입사를 했는데 사수분께선 9월 초에 내려가신다는 말에 내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거의 사흘만에 모든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고, 당연히 모든 걸 머릿속에 넣을 순 없었다.


성격도 털털하시고 손이 빠르다고 들어서 소통하며 많이 배우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했던 건 회사 행사로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두바이 박람회 일정, 모든 분들이 그 일정으로 바빴는데 사수분께서는 본인이 다 해 놓긴 했지만, 혹시라도 수정 사항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외 다른 그 리플렛을 맡게 될 수도 있으니 우선은 폴더 파악하고, 업무 파악에 힘쓰자고 다독여 주셨다. 


더 힘이 되었던 건 자신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해 주지 못하고 가 미안하다며 전화 바로 받을 테니 언제든지 전화로 물어보라고 하셨던 것이다. 퇴사하면 사실상 남일인 것을, 이토록 신경 써 주시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물론 희소식도 있었다. 당연한 거일 수도 있지만, 내게 맞는 장비를 맞춰 주신다는 소리에 뛸듯이 기뻤다.

이게 마, 바로 스타트업인 거가. 꿈에 그리던 아이맥을 회사 사무실에서 써 보는 건가 싶어 마음이 부풀었다. 물론 원래 사수분께서도 15년형 아이맥을 쓰고 계시긴 했다. 모두가 아는 그 전형적인 레트로풍 아이맥. 오히려 디스플레이가 훨씬 크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비하인드 스토리긴 하지만 사수 분께서 그만 두시고 나서 듀얼 모니터로 야무지게 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미러링을 시도하니 화질이 구려지고... 이상한 이슈에 회사의 모든 개발자분들이 달라붙어 시도했지만 15년형 모델부터 듀얼 모니터 지원이 되지 않는 이슈에 아이맥 두 개를 쓰겠다는 심산은 보기좋게 무너졌다. 결국 맥 M2를 최고 사양으로 맞춰 구매하고, 트랙패드가 삶의 질을 그렇게나 올려 준다기에 함께 조심스레 부탁드렸다.





오후가 되어 점심 시간이 되었다. 출근 시간이 8 to 5라 점심도 이른 편이다. 점심 시간은 11:20분.

우리 회사는 새로운 사람이 오면 그 사람과 한끼 식사를 함께 하는 문화를 갖고 있는데, 만약 대표님이 사무실에 계시다면 모든 직원이 한꺼번에 먹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는데 내 케이스에선 조를 나누어 따로 여러 번을 먹었다. 첫 날은 대표님이 계셔 대표님과 디자인 실장님, 마케팅부 실장님 기존의 디자이너 사수분과 함께 밥을 먹었다. 회사 근처에 맛있는 쌀국수 가게가 있어서 거기서 점심을 함께 했는데,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는 편한 듯 아주 불편했다.


디자인 실장님과 대표님은 부부 사이고, 당장에 그만 두시는 디자이너분께서 결혼을 목적으로 퇴사를 하는 판국인지라 밥을 먹는 내내 결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물론 마케팅 실장님께서도 유부남이셨다. 자연스레 신입에게도 질문이 이어졌고, 딱히 결혼에 뜻이 없는 내게 떨어지는 질문들은 날 좌불안석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러쿵저러쿵 정신은 없었지만 오후에 들어와서 매뉴얼 파악도 마쳤고, 여태까지 진행했던 유저테스트의 의견들을 샅샅이 살펴보기도 하면서 서비스를 파악했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하루가 이틀, 이틀이 삼일, 이윽고 한 달이 되었다.


한 달 간 내가 느낀 스타트업의 특징은 대충 이러하다.


1. 일인다무제

 내 직업 특성상 바쁜 시즌이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행사가 잡히면 필요한 서류나 홍보물이 있으면 내 직업이 아무리 UIUX 디자이너여도 그래픽 디자인이나 책자 디자인을 해야 한다. 또한 3D 디자인을 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시늉이라도 내야 하며, 그에 관한 에펙이나 블렌더 등의 툴을 새로이 배워야 하는 곤욕도 만만치 않다. 달리 생각하면 나의 역량이 많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나쁘진 않지만 내 일도 바쁠 때 다른 일정의 디자인 짬처리를 해야 하는 게 짜증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2. 원활하지 않은 소통

내 기준 가장 큰 이슈다. 우리 회사는 거의 기획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정은 사업기획으로 이루어진다. 공모나 정부 사업이 있으면 무조건 물고 오기 때문에 급하게 떨어진 일은 급하게 처리하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이때, 필요한 내용이 해당 담당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누락되는 경우로 인해 대표님이 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3. 겉만 번지르르

이건 스타트업 특성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공공을 위한 서비스를 만든다고 한 우리 회사의 모토는 생각보다 주먹구구식의 나 몰라라식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회사에 기대한 바는 많은 실망으로 변했다. 뚜렷해 보이는 회사의 아이덴티티는 결국 정부 사업을 가져오기 위함, 기업의 생존의 문제였다.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두고 업무에 임하고 싶었던 나는 자꾸만 겹치는 사업 기획의 굴레에 결국 서비스의 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았다.



4. 대표님 지인 파티

이건 회바회긴 하지만 디자이너 커뮤니티나 옾챗 방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슈 중에 하나인 듯하다. 팀장님이 대표님 여자친구라는 회사도 있고, 자기 사촌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이 봤는데 우리 회사도 나잇대가 있으신 분들은 죄다 대표님 지인이라고 보면 된다. 우린 보통 2030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에 40대와 50대가 어울려있는 분위기는 대표님 지인으로 회사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케이스로, 생각보다 맡으신 업무가 크지는 않지만, 나름의 일은 또 있으신 직위다. 

최대한 흐린 눈으로...


이밖에도 사람에 대한 문제나 앞서 내가 말한 것처럼 업무에 대한 프라이드가 꺾이는 등 많은 일이 있다. 어느 회사나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성장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면 나 스스로 개척해야만 하고, 그 과정을 회사가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굉장히 애매한 테크트리가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회사 분위기 자체는 꼰대 문화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서 사람에 대한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세 달 정도 지나니 3년은 같이 있었던 것처럼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초반에는 업무에 대한 낯섦과 사람에 대한 낯섦이 커서 혼자서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배우는 점은 어디에나 있고, 어떠한 경험도 무의미한 경험은 없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인하우스는 인하우스대로, 에이전시는 에이전시대로 각각의 매력과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스타트업을 고집해왔던 이유는 상황에 대한 유연함과 틀에 박히지 않은 기업 문화가 컸기에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뭐 하나 답은 없으니 모든 취준하시는 분들께서 고심에 또 고심을 거듭해서 알맞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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