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에 관해
이 정도 분량의 작품 중에서 데미안을 능가하는 작품이 있을까? 나는 아직 없는 것 같다. 내게는 없다. 처음 읽었을 때, 두번째 읽었을 때, 세번째, 네번째 읽었을 때 모두 다른 깊이와 감동을 주었던 헤세의 작품.
마지막으로 읽은 건 몇년 전인데, 이때 데미안을 읽으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어떤 관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데미안은 그가 바라던 것, 그가 꿈꾸던 것, 그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가는 길잡이로서의 형상일 뿐, 어쩌면 실존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고. 실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삶에서 저런 존재들은 툭 튀어나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인물로서 나오지 않아도 내가 알을 깨고 나오게 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건 알고 지내던 사람의 지나가던 한 마디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등산을 갔을 때 느낀 감격이기도 하고, 끔찍한 상실의 사건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다는 결심이기도 하고.
실제로 프란츠 크로머라는 악당을 없애준 상급자 선배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를 노려보고 경고의 말을 한 것은 싱클레어 자신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성장을 위해 으레 그런 과정을 겪지 않던가. 그러나 크로머 같은 이가 사라진다고 해서 삶을 썩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
그러니까 어찌 되었건 싱클레어는 방황해야만 한다. 그가 술집에서 방황하고 은둔 속에서 헤매야만 했다. “이 길만 지나면, 이 코너만 돌면 그녀가 올 거야”라고 기다리고 고뇌하고 속삭이던 시간.
그러나 발걸음을 움직일때 그 믿음을 심어준 존재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게 책일 수도, 실제 사람일 수도, 뭐 아무거나 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말미에서 싱클레어는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 것이다. 데미안을, 어쩌면 그가 바라던 그 자신을.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내가 바라는 사람이고,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기다려온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