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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서 얻은 것들

비워진 항아리를 채우는 나만의 레시피

제우스는 좋은 것들을 죄다 항아리에 담고 나서 어떤 사람에게 간수하라고 맡겼다. 호기심 많은 사람은 항아리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싶어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좋은 것들이 모두 신들에게도 날아가 버렸다. <이솝 우화, 제우스와 좋은 것들이 든 항아리>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는 보물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진정한 보물은 여정 과정에서 얻는 경험과 지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로는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는 과정에서 더 값진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직장에 입사할 때는 특별한 목표가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하다 보니 승진도 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IMF가 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구조 조정 소식이 들려왔다. 구조 조정 대상에 부부가 포함된 곳도 있었다. 나 또한 부부가 같은 직장이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IMF 위기가 지난 지났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근무 평정 1순위였던 내가 부부가 같은 직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2순위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조금 더 늦게 승진하면 되지'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3순위까지 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노력으로 되는 일이면 더 열심히 하면 되었겠지만, 원인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이 캄캄했다. 승진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는데 내 삶은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이솝 우화에서 호기심 많은 사람이 항아리의 뚜껑을 여는 순간 좋은 것들이 신들에게 날아가 버린 것처럼, 세상의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직장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이였기에, 승진이라는 희망이 없어진 미래를 마주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살아야 할 날은 많은데 낙심하는 마음으로만 지내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나에게 이곳이 최선일까? 이것 말고는 할 것이 없을까?' 머릿속에는 온통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즐겁게 사는 것인가?'라는 질문뿐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상황으로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우선 직원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에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었다. 음식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핸드폰 레시피가 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직원들이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요리하는 건데 요리사의 꿈을 가져볼까? 퇴직하고 해도 되고." 요리 관련 밴드를 찾아 가입했고, 하루 한 번 점심 반찬을 만들어 사진을 올렸다. 밴드 회원이 많아서 댓글도 많이 달아주니 날마다 요리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사진을 찍으려니 음식도 예쁘고 담고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직원들은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요리사에게 요리 팁도 배울 기회이기도 했다.


요리함으로써 직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출근하는 것이 즐거웠다. 평소 같으면 3일 하고 지칠 테지만, 다른 곳으로 발령 날 때까지 2년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고난은 당장은 힘들지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말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어도. 마지막 한 가지, 즉 주어진 상황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승진이라는 외부 환경은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 상황에 대한 태도와 반응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 준비로 인해 직장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고, 다른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열렸다. 직장 핑계로 반찬 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직장에서 하는 습관이 집에서도 자연스럽게 요리하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다. 승진에 대한 어려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외로웠던 나에서 벗어나, 이제는 혼자 독서하고 글 쓰는 시간이 그 어떤 시간보다 행복하다. 이솝 우화에서 항아리가 열려 좋은 것들이 날아간 것처럼. 내 인생에서 중요한 희망이 날아가 버렸지만, 비어버린 항아리는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승진이라는 익숙한 목표를 잃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요리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았고, 그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 제우스의 항아리가 열린 것이 축복될 수 있다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 모두에게는 비워진 항아리를 새로운 희망으로 채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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