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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정과 지혜로운 판단 사이

잃어버린 고깃덩이, 찾아낸 자아

고깃점을 훔친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앉았다. 까마귀를 본 여우는 자기가 그 고깃점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우는 멈춰 서서 몸매가 균형 잡히고 아름답다고 까마귀를 추어올리며, 까마귀야말로 누구보다도 새들의 왕이 될 만하고 또 목소리만 가지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까마귀는 제가 목소리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우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고깃점을 놓아버리고 큰 소리로 울었다. 여우가 달려가 고깃점을 낚아채며 말했다. "까마귀야, 네가 판단력까지 갖추었다면 새들의 왕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텐데?"<이솝 우화, 까마귀와 여우>




우리는 이솝 우화 속 까마귀와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고깃덩이를 물고 있던 까마귀가 여우의 달콤한 칭찬에 현혹되어 고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나 역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다 정작 소중한 것을 놓쳐버렸던 순간이 있다. 어머니, 나, 오빠, 3명이 함께 살던 시절이 떠오른다.


방 한 칸과 부엌, 다락방이 있는 작은 집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추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5살 차이 나는 오빠는 무더운 여름에도 다락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공부했다. 물이 바다 덮음처럼 땀이 오빠의 얼굴을 덮었다. 젖은 얼굴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오빠는 마치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 같았다.


어머니는 친구도 없이 다락방에서 공부만 하는 오빠를 걱정했다. "친구도 없이 저러다가 우짤라고 그라노.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면 얼마나 좋노" 오빠는 그랬다. "엄마, 걱정마라. 좋은 학교 가면 친구들은 저절로 생길끼다." 오빠는 어머니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빠가 S대학교 경영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했을 때, 9시 뉴스에도 잠깐 나오고 장학금도 받았다. 하지만 대학 생활과 인맥이 넓어진 오빠는 명절에도 얼굴 보기 힘들어졌다. 오빠는 여우의 칭찬에 고기를 놓친 까마귀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더 넣은 세상을 선택했다.


오빠와 달리 나는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선생님이 다른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속상해하며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마치 여우의 칭찬에 울음소리를 내기 위해 고기를 놓친 까마귀처럼, 인정받기 위해 진정한 욕구와 필요를 놓쳐버렸다.


누군가 내 일에 잘못을 지적하면, 인정받을 때까지 끝없이 설득하려 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24. 노벨문학상 수상작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가 억눌러온 내면의 해방을 위해 몸부림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나도 타인의 인정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환갑이 되어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이제는 까마귀가 여우에게 속았던 순간을 이해한다. 영화 <고령화>에서 노부부가 인생 말년에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참 힘들었겠구나. 이제 편하게 쉬어도 돼. 너는 너 자체로 소중해. 일부러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예전의 나처럼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때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전하고 싶다. 까마귀가 여우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현명하게 판단했더라면 '새들의 왕'이 되지 못했을지언정 고깃덩이는 잃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기지로 우리도 타인의 인정보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볼 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 알게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런 시간을 아끼고 지금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했으면 한다. 오늘 읽은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나의 내면을 단단히 세우고 나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생각으로 나를 채워주세요." 까마귀는 노래를 들려주느라 고기를 놓쳤지만 우리는 고기를 지키면서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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