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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미 May 18. 2024

결론은 역시 비혼이다 (上)

나는 결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feat. 시집살이)



단비와 살다 보니 비혼이 되었다는 흔하고 뻔 한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나는 20대 초중반부터 비혼에 대한 고민을 했다. 당시 친구들과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오랫동안 솔로일 예정이니 같이 실버타운에 들어가자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말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시집간다고 친구들이 놀렸지만, 결과적으로 그 친구들은 다 가정을 이뤘고 나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먼저 이 글은 결혼을 하는 게 좋다, 나쁘다를 논하는 글은 아니다. 단지 내가 왜 비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금까지 나의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어릴 때 나는 당연히 스물여덟 쯤 결혼해서 두 명 정도의 아이를 키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시에도 꽤 일찍 결혼을 하셨으며, 친구들 사이에 우리 부모님이 제일 젊었다. 나는 그게 너무 좋았고, 덕분에 일찍 결혼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내가 부모님이 결혼한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현실을 너무 알아버렸고, 이 나이에 결혼해서 집도 사고 애도 낳고, 육아를 할 거란 자신이 없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20대를 꽤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그때부터 아마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도 같다.




18년도에 쓰리잡을 병행하며 대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살다 보면 5년 뒤에는 정말 행복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면, 그렇게 살면 나에게도 봄날은 꼭 올 거라고 믿었다. 보이스피싱을 당하면서 내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은 박살이 났고, 더 이상 내 미래에 희망적인 환상 같은 건 없었다.




결혼이란 건 상대의 가족과 나의 가족 간의 화합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남편이 생긴다면 남편의 가족까지 나와 내 남편이 책임져야 할 몫이고, 내가 싫다고 한들 남편이 가족과 의절한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가족도 책임질 능력과 힘이 없는데, 타인의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그건 나처럼 책임감이 높은 사람들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시작도 전에 고민이 되는 부분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30년 넘게 살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내가 살아온 시절보다 더 길게 살아오셨을 남의 부모님과 남과 가족이 된다니. 자신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심하게 시집살이를 당했다. 아빠는 집안의 장남이었고, 나는 그 집안의 장녀였다. 할머니는 내가 손자가 아니라 싫어하셨고, 증조할머니는 여자인 나와 내 동생에게는 늘 천 원을, 남자 사촌 동생에게는 만 원을 용돈으로 주셨다. 나는 사촌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증조할머니가 돈을 잘 모르셔서 우리에게 천 원으로 용돈을 주는 줄 알았다. 우리 집에 막내가 태어났고, 내 막냇동생이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기도 전에 5만 원을 용돈으로 받았다. 드라마나 책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남녀 차별을 피부로 느끼면서 자랐다.




고모는 시댁이 아니라 친정에 와서 명절을 보낸다. 시댁에는 하루 혹은 반나절 있다가 친정으로 내려온다고 들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약 20년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명절에 친정에 갈 수 있었다. 내가 외할머니댁을 가는 날은 보통 명절이 아니었고, 심지어 1년에 한 번도 안 갈 때가 더 많았다. 아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내 기억에 따르면 20번도 뵙지 못한 것 같다. (내가 기억이 없던 어린 시절은 제외하기로 한다.)




엄마는 정말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잘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할아버지댁과는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로 이사를 했는데, 갈 때마다 떨어진 생필품들과 식재료들은 우리 부모님이 채웠다. 그런데 우습게도 사랑을 받는 건 용돈을 더 많이 주는 작은 아빠와 고모였다. 명절과 휴가 때만 방문하는데도, 자주 방문하는 우리보다 작은 아빠와 고모를 더 예뻐하셨다. 엄마는 늘 주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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