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인사는 드려야겠다
지난달 초, 동생이 예비 제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지역으로 온 가족이 모였다. 그때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어서 꽤 충격을 받았다. 거의 5~7년 만에 뵙는 할아버지는 이제 100세에 더 가까우시다.
동생은 꽤 오래 연애를 했다고 들었는데, 동생과 연애 관련 얘기는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연애했는지는 모르겠다. 단비와 내가 알고 지낸 시간보다 동생네 부부가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길다는 것만 알고 있다. 엄마는 이렇게 오랜 기간 연애를 한다면,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부모님에게 소개를 시켜주는 게 '예의'라고 했다. 나는 그 혹시 모를 일 중 아무것도 생길 일이 없으니 절대 단비를 소개해주지 않겠다고 했었다. 아마 동생네 부부가 연애할 때 예비 시댁에 먼저 인사를 드렸던 게 꽤 마음이 상하신 모양이다. (시댁에는 인사를 드렸지만, 우리 부모님에겐 제부를 소개하는 자리는 올해가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마냥 어리고 젊을 거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 우리 부모님이 나이 들고 계신다는 사실이 성큼 다가오더라. 평생 단비를 소개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혹시 모르는 일이 생기기 전에 부모님께 단비를 인사시켜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집에서 나오는 얘기는 각자가 사전에 차단에 서로에게 전달될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어른들을 뵙게 되면 어떤 얘기가 나올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리는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인사만 드리는 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비도 나도 각자 집에서 결혼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절대 그냥 인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니 우리 아빠가 건강할 때, 우리 엄마가 건강할 때 소개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결혼과는 별개로 엄마가 어떤 놈이냐고 항상 궁금해했고, 본가에 갈 때마다 아직도 그놈을 만나냐고 물으시니까. 평소라면 평생 볼 일 없으니 궁금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할아버지를 뵙고 나니 단비와 상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얘기는 결단코 아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고맙게도 단비는 내 마음을 헤아려줬고, 아마 빠르다면 1~2년 내로는 인사를 드리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인사드리러 가자고 했을 때 한사코 거절했었다. 지금 당장이 아닌 이유는 생각은 단비가 어떤 조건을 걸었기 때문. 단비랑 만나면서 20키로가 쪘는데, 그 20키로를 빼면 인사를 드리러 가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기간을 1~2년 이내로 잡은 것이다. 근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내가 비혼을 마음먹은 것과는 별개로 친한 친구들과 주변 지인들이 결혼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 감정을 아직까지 뭐라고 딱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매번 고민해 보지만, 부러움의 감정은 확실히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안정적인 가정이 생긴다는 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을 준달까? 그렇다면 나는 평생 안정적인 자리를 잡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근데 또 이 문장으로도 완벽하게 그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불안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건, 내가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결혼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뭐, 그렇다고 내가 지금 불행한 건 아니니까.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주는 인식 때문에 가정을 꾸리는 친구들이 부러운 거라면 더더욱 그 통념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는 나만의 인생을 살면서 내 가족(우리 부모님과 동생들)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그만이고, 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면 단비까지 케어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너무나 짧고,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기에는 나는 제법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남을 챙기고 신경 쓰느라 나를 등한시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내가 비혼을 선택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