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 겨울은 특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왔었나? 가물해지면 눈이 왔다. 눈이 오면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일 생겼네. 눈 치워야 되니.' 하거나 사진기부터 들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불속에 꼭꼭 숨어 바깥공기와 대비되는 따뜻함을 즐기기도 한다. 뽀득뽀득. 눈 밟을 때 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하얗게 눈 쌓인 동네가 새삼스러워 이곳저곳 구경 다녔다. 매해 봐온 풍경임에도 자꾸만 만지고 싶고 기록하고 싶었다.
한천교를 지나며 다리 난간에 쌓인 하얀 덩어리들을 툭툭 건든다. 내리는 눈 결정체를 손바닥으로 받아본다. 몸을 움직거려 보며 그때마다 달라지는 색색의 눈의 프리즘을 관찰한다. 일상이 달라지니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예년 이맘때쯤에는 항상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서류와 컴퓨터에 둘러싸여 얼굴이 벌겋게 된 채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가끔 기지개를 켤 때 창 밖에 보이는 눈 온 풍경에 사무실의 냉랭함과는 사뭇 다른 온도의 차가움을 느끼곤 했다.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여유로운 겨울방학이 익숙한 풍경에 눈을 뜨게 했다.
과학 숙제를 한차례 끝내고 나면, 실과시간이다. 진로를 탐색하고(이 나이에?)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쌓는다. 이번 겨울방학 동안 끝낸 것 중 대표적인 것 한 가지씩 얘기하자면 '글쓰기'와 '밀푀유 나베'. 글을 참 많이 썼다. 드는 생각, 고민, 계획, 일기, 기도를 가감 없이 썼다. 글쓰기로 날 것의 나를 생생하게 드러냈고, 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 내면의 모습을 적절하게 실체화했다. 글쓰기가 하고픈 것을 찾고 실천하게 된 시초이다. 한 동안, 앞으로 쭉 많은 글을 쓸 예정이다. 삶의 여정이 남았으니!
뜨끈한 국물이 식욕을 당기는 날 무엇을 해 먹겠냐 묻는 다면 '밀푀유 나베'이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국물 요리(라면 제외)기 때문이다. 물론 맛있기도 하고. 요리를 정말 잘하는 이망이가 집에 놀러 왔을 때 어깨너머로 배운 요리가 밀푀유 나베이다. 쉽고 맛있다. 정말. 굉장히 맛있는데 이걸 표현할 방법이 없네.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생전 안 하던 요리를 혼자 살게 되니 하게 되더라. 미국에 계신 부모님들이 한국에 오실 때 직접 해드릴 요리 한 가지는 있어서 다행이다.
오춘기 같은 내 30대의 겨울 방학이 지났다. 너무 인상 쓰고 고민하며 보낸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눈을 부릅뜨고 미간을 팽팽히 당겨본다. 산처럼 큰 고민거리도 눈 녹듯 사라졌고, 집 앞 쌓인 눈도 대지에 스며들어 간데없다. 흘려보낸 마음의 짐이 다른 모양으로 내 속에 채워지진 않았는지 들여다본다. 좀 가볍게 살아보자. 한 계절 돌아보니 잘 살았다. 단단한 몸가짐으로 새 학기를 맞는다. 또 지나고 돌아보면 잘 살았다 할 거다. 그러니 마음 비우고, 그저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