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향인이다.
아내는 나보다 자신이 더 내향적이라며, 내가 내향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 내향인이다.
내향적인 성향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 공감 능력은 별개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보다 혼자 있거나 집에 있을 때 에너지가 더 충전되는 걸 보면, 내향인의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이런 내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는 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영어도 못하고, 붙임성도 없는 성격인데, 그 광활한 대륙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니. 대담한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무모했던 걸까?
그럼에도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호주 워홀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잉햄(Ingham)’이라는 닭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잉햄’에 다녔다고 하면 부러움을 샀지만, 한국에서 닭공장에서 일했다고 하면 묘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많았다. 아낌없이 주는 닭, 그리고 영화 극한직업의 명대사—“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때문일까. 어쩐지 ‘닭공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재미있는 토픽이 된다.
잉햄에서는 오전 타임과 야간 타임으로 나뉘어 근무했는데, 나는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일하는 야간 조에 배정됐다. 주문량이 많을 때는 희망자에 한해 오버타임도 할 수 있었다.
출근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정해진 시간에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맡은 일은 ‘Drumstick’ 파트, 즉 닭다리 부위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다양한 트레이 용기에 닭다리를 담고, 벌크 포장도 하고, ‘Lovely Legs’라고 불리는 특정 부위도 처리했다. 닭다리만 쏟아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나는 내 평생 볼 닭다리의 90%를 그때 다 본 것 같다. 끝없이 밀려오는 닭다리를 빠르게 트레이에 담아야 했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떠오른다. 혹여라도 닭다리를 떨어뜨릴까 봐 손이 바쁘게 움직이던 그 순간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육체노동의 장점은 고민할 필요 없이 몸을 움직이면 된다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머리를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노동환경도 괜찮았다. 무거운 물건은 동료들과 함께 들었고, 1시간 반 정도 일하면 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 휴식 시간이 꽤 부담스러웠다. 초반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보려고 했지만, 영어가 전혀 되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다 보니 점점 대화에 주눅이 들었고, 결국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의로 말을 걸어주어도 점점 멀찍이 서 있게 됐다.
다행히 같은 파트에 한국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영어가 유창해서 가끔씩 동료들과의 대화를 중재해 주었다. 덕분에 완전히 고립된 건 아니었다. 심지어 엉겁결에 파티에 초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파티는 내향인인 나에게 너무나도 큰 미션이었다. 여자들은 멋지게 차려입고 왔지만, 나는 후줄근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애초에 워홀을 가면서 ‘멋진 옷을 챙겨야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 낯선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들은 서로 모여 떠들고, 나는 구석에서 어색하게 술을 홀짝이며 시간을 보냈다.
파트 동료들은 계속 말을 걸어 주었고,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최대한 들으려 애썼다. 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스스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느껴졌다. 결국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해졌다. 그렇게 그들과 완전히 섞이지도,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햄에서의 시간은 내게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환율이 높았고(1,200원 정도), 세금도 덜 떼여 월급이 꽤 많았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일이 끝나면 아무런 고민 없이 쉴 수 있었다. 지금은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지만, 일이 끝나도 내일 할 일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할 때는 그런 고민이 없었다. 마음이 편했다.
잉햄에서 만난 한 한국인 부부가 있었다. 그중 한 분은 IT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했고, 결국 본업으로 닭공장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퇴근 후 아무 걱정도 없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답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생활을 했지?’
사교성 없는 내가 어찌어찌 일을 구하고, 셰어룸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편하게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