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학생 시절엔 성적이라는 것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어느 정도는 보여줬다.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고, 준비가 부족하면 낮은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시험엔 정답이 있으니, 맞히면 점수가 올라가고 틀리면 감점되는 단순한 구조였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받는 평가는 그렇지 않다. 수치로 딱 떨어지는 결과도 아니고, 정해진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우리가 양궁 국가대표 선발을 칭찬하는 이유는 그 평가가 철저히 정량적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정확히 과녁을 맞히느냐에 따라 순위가 정해지고, 그 결과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선수들의 사연이나 배경은 알 수 없지만, 공정한 룰 안에서 치러진 경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평가받는 건 아니다. 어떤 스포츠 종목은 실력 외적인 이유로, 혹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국가대표가 정해지기도 한다. 이른바 ‘라인’이나 ‘파벌’ 같은 단어가 나오는 이유다.
나 역시 사회에서 처음 받은 평가는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을 때, 나는 잉햄이라는 닭공장에서 일을 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직원들의 작업 속도나 실수율 등을 기준으로 급여를 올려주는 ‘레벨업 평가’가 있었다. 정확한 기준은 직원인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매니저는 내 포장 속도가 느리다고 말했다.
그 평가를 들었을 때, 불쾌함과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같은 시기에 입사한 동료는 급여가 올랐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낮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말했지만, 돌아서 나오는 길에 속이 끓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적한 길목에서 소리를 질렀다.
“악!!!”
그날 이후 머릿속은 온통 자기방어적인 생각들로 가득했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느리다고 판단한 거지?’
‘내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일했는데.’
‘결과가 이런 거면 앞으로 뭐하러 열심히 해?’
스스로의 자존감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열심히 해봤자 누구도 그걸 보지 않는다면, 노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날 이후부터 일터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정성 들여 닭다리를 고르고 선별하며 포장하던 그 시간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 수많은 패키징 속에서 내가 조금 더 신경 쓴다고, 그게 뭐가 달라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렇게 ‘의미 없음’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평가는 단순히 결과 하나를 말해주는 게 아니라, 때로는 사람의 마음까지 무너지게 한다.
억울함, 자기부정, 반항심… 수많은 감정이 오갔다.
차라리 대충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성실했던 내가 더 바보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2주 후 다시 평가가 있었다. 이전보다 별로 나아진 것도 없었는데 이번엔 급여가 올랐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물론 기분은 좋아졌지만, 처음 받았던 그 불명확하고 일방적인 평가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군가의 평가를 받을 일이 계속 생긴다. 그게 업무 성과든, 동료들의 평판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평가받는다.
때론 나보다 높게 평가받는 사람을 보며 불공정하다고 느끼고, 때론 내가 기대한 것보다 낮은 평가를 받아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평가가 반드시 나를 정확히 비추는 거울은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시선일 뿐이고, 어떤 평가는 오래 남지만 결국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진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평가받으며 살아가지만,
그 평가가 내 가치를 온전히 말해주진 않는다는 걸 조금씩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