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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May 25. 2020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종마’였다. 종마(種馬)란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서 번식을 목적으로 키우는 말(馬)을 가리키는데, 그중에서도 종자가 좋기로 유명한 수컷의 가격이 정말 비쌌다. 내가 취재한 말은 미국산 씨수말로, 한 마리의 가격이 40억 원이 넘었다. 실제로 보니 말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내가 봐도 다른 말들을 압도하는 우람한 체격에 윤기가 줄줄 흐르는 털의 모습이 매우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말의 역할은 오직 번식이었다. 매년 봄이면 암말 100여 마리와 교배를 하는데, 하루 평균 세 마리의 암말과 교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 비싼 고기와 품질 좋은 약재 등 온갖 좋은 음식들을 먹고 전문가들의 특별 관리 속에 운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계자의 말로는 종마의 품종이 좋을수록 잘 달리는 우수한 경주마가 태어나기 때문에 암말을 갖고 있는 마주들이 이 말과 교배를 시키기 위해 줄을 서있다고 한다. 이렇게 마주들이 선호하는 종마는 국내에 몇 마리 되지 않기 때문에 단 몇 마리의 종마가 우리나라 모든 경주마들의 아빠인 셈이다


 교배장에 들어가니 커다란 암말 한 마리가 먼저 와서 종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쉽게 기회가 오지 않는 종마와의 교배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기에 교배장 안에는 잔뜩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마주의 손에 이끌려 수말 한 마리가 들어와 암말 뒤에 섰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어딘가 빈약하고 털도 푸석한 게 내가 아까 본 그 종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교배는 그대로 시작됐다. 수말이 암말에게 끌린 듯 가까이 다가가고, 암말이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교배가 이뤄지려는 찰나, 갑자기 마주가 수말을 잡아당겨 잽싸게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 순간 반대편 문이 열리고 내가 아까 본 우람한 체격의 그 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당당하게 나타난 종마는 순식간에 암말과 교배를 마치고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보다 종마와 암말의 교배 사이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 수말의 정체가 궁금했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있는 내게 관계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다. 교배가 준비되지 않은 암말에게 함부로 수말을 들이밀면 암말이 화가 나서 뒷발로 수말을 차버리는데 그 힘이 대단해서 수말이 다칠 수 있다고 한다. 비싼 종마가 그런 식으로 다치면 안 되기 때문에 먼저 종마가 아닌 평범한 수말을 교배장에 들여보내서 암말의 반응을 살펴본 뒤 암말이 이 수말을 걷어차면 교배를 미루고, 반대로 암말이 교배할 준비가 됐음이 확인되면 얼른 그 수말을 빼버리고 종마를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관계자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종마와 암말의 교배를 위해 매일같이 교배장을 들락거리며 암말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그 평범한 수말이 참 가엾게 느껴졌다. 종마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나지 못해 정작 교배는 해보지도 못한 채  수많은 암말한테 걷어차이기나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라니, 참 딱하기 그지없었다. 품종 좋은 경주마를 원하는 인간들을 위해 그렇게 희생만 하며 살아가는 그 말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인간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동물들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거의 매일 먹는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닭들은 A4용지 크기보다 작은 면적의 케이지 속에서 날개를 펴기는커녕 옴짝달싹 하지도 못한 채 달걀 낳는 기계가 되어 평생을 살아간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삼겹살을 공급하기 위해 움직이기도 힘든 틀 속에 밀집돼 전염병을 막기 위한 항생제를 먹으며 동물의 본능은 모두 거세된 채 살아간다. 오직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한 삶이다. 그러다 구제역이라도 발생하면 감염 여부와 관계없이 모조리 살처분돼 땅에 묻혀버리는 게 현실이다. 최근엔 살처분 뒤에 땅에 묻는 식으로 그 방식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산 채로 울부짖는 돼지들을 땅 속에 그대로 묻어버리는 충격적인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구제역 살처분 현장 (출처: 중부일보. 2018년)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소, 돼지 농장 중에서 동물이 동물답게 살 수 있는 농장으로 인증받은 곳은 1%도 안 된다고 한다. 인간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동물의 삶을 비참하게 지배하는 것일까. 동물들 역시 감정과 정서가 있다는 글을 읽을 때마다 인간의 이 잔인함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올지 섬뜩하기만 하다.


 얼마 전 특별한 정당 하나가 창당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름이 ‘동물당’이다. 우리 사회의 약자인 동물을 대변하기 위한 정당이라고 한다.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돼 착취당하고, 학대당하고, 학살당하는 ‘비인간 동물’의 권리와 이익을 지켜주는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관계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81809001&code=100100

 동물당.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다. 외국에는 이미 19개 나라에 동물당이 있고, 네덜란드에서는 동물당이 상, 하원 모두 국회의원을 진출시켰다고 한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창당이 추진되고 있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당 중에서 자신들이 아닌 남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정당이 동물당이 아닐까 싶다.

 동물당이 창당에 성공하길, 더 나아가 국회에도 진출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 집 강아지 광복이도 자신을 대변해줄 정당을 갖게 되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동물이 동물다워지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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