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에겐 버스와 관련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몇 달 동안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멀리 통학해야 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 학교가 서울 용산의 이촌동에 있었는데, 경기도 오산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수원보다 더 남쪽에 있는 오산은 30여 년 전에는 지금처럼 번화하고 전철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화성군 오산읍’에서 ‘오산시’로 승격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때였고, 좁은 시내를 벗어나면 논밭이나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도시보다는 농촌 마을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기차도 통일호나 무궁화호는 서지 않고, 모든 역을 다 정차하며 천천히 운행하는 비둘기호만 섰기 때문에 서울에 가려면 가급적 고속버스를 타는 것이 나았다.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려면 고속버스 첫 차를 타야 했다. 집에서 아빠가 태워주는 자전거를 얻어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간 뒤, 고속버스 첫 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서울 서초동에 있는 남부터미널에서 내리면, 다시 지하철을 ‘3호선-2호선-4호선’으로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초등학교를 말이다.
그때 매일 고속버스에서 만나는 승객들은 거의 같은 사람이었다. 대부분 5,60대 아줌마와 아저씨들이었는데, 그분들 사이에서 나는 슈퍼스타였다. 꼬마 아이가 큰 가방을 멘 채 혼자 매일 고속버스 첫 차를 타고 먼 길을 다니니 그분들 눈에 얼마나 신기했겠나. 내가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타나면 저마다 반갑게 맞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각별히 날 챙겨주신 분도 많았다. 어떤 아저씨는 일부러 먼저 와서 내 자리를 맡아주었고, 어떤 아주머니는 아침 간식을 챙겨 와서 나눠주었다.
특히 생각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신데,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자 아주머니는 매일 플라스틱 물통에 뜨거운 물을 넣어와 나에게 건네주며 손에 꼭 쥐고 있으라고 하셨다. 아줌마표 ‘핫팩’이었던 셈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가량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그 물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가, 고속버스에서 내릴 때면 미지근하게 식은 물통을 아주머니에게 돌려주고 학교로 향했다. 그럼 아주머니는 멀리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네주곤 하셨다.
당시 나에게 그분들은 이모나 삼촌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존재였지만, 그분들이 왜 매일 첫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디 가시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일하러 간다고만 했지, 무슨 일을 한다고 얘기하는 분이 없었다. 다만 모두 복장이나 행색이 비슷했고,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서로 챙겨주는 것으로 보아, 다들 비슷한 일을 한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됐던 그분들과의 따뜻한 여정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온 식구가 다시 서울에 모여 살게 되면서 끝이 났고, 내 머릿속에서 그분들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잊혀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일이 생겼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새벽 시내버스에서 30여 년 전의 그분들과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인심을 가진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고 노회찬 의원의 연설에 등장해 유명세를 탄 서울 시내버스 6411번 첫차에서였다. 이틀 동안 이 버스를 타고 새벽 4시에 서울 구로에서 출발해 강남으로 가는 출근길 노선을 동행했는데, 차고지에서 출발하고 얼마 안 돼서 버스는 완전히 만원 상태가 되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도 고 노회찬 의원의 연설 이후 첫 차가 한 대 더 늘어나 두 대의 버스가 동시에 출발하게 됐다는데도 그랬다. 한 대만 다닐 때는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탄 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상적인 건 모두 버스에서 만난 사이인데도 마치 친구, 혹은 언니, 동생처럼 반갑게 맞아주며 서로 챙겨준다는 거였다. 각자 행선지는 달랐지만 누가 어디서 내리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서로 가방도 받아주고, 간식도 나눠주며 고단한 새벽 출근길을 함께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누가 하루 안 보이면 걱정을 하며 안부 전화도 한다고 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그랬다. 30여 년 전 날 아들처럼, 조카처럼 챙겨주고 아껴주던 고속버스 첫 차 속 아줌마, 아저씨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강남의 대형 건물이나 도로에서 환경미화를 담당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그렇게 일찍 출근하라고 시키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다니기 전에 청소를 모두 마치고 사라지려면 그 시간에 출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버스가 5분이라도 늦어지면 발을 동동 구르고, 버스에서 내려서도 있는 힘을 다해 일터까지 달려가는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얼굴을 모르고, 이름도 모르며 투명인간처럼 존재하기에, 그 고단함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는 그런 분들이었다.
30여 년 전 그 고속버스 속 아줌마, 아저씨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 그때의 고단함을 이제는 좀 벗어버리셨을까. 함께 새벽 고속버스를 타던 그 꼬마를 기억은 하실까. 혹시라도 지금의 날 알아보신다면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그때 당신들이 나눠주었던 온기가 그 꼬마의 가슴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고.
고 노회찬 의원의 연설 일부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6411번 버스가 출발점부터 거의 만석이 되어서
강남의 여러 정류소에서 5,60대 아주머니들을 다 내려준 후에
종점으로 향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www.instagram.com/kkh_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