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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Nov 02. 2020

너, 외동아들이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조문을 위해 빈소를 찾은 직장 동료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너, 외동아들이었어?”


 장례식장 안내판의 상주란에 내 이름 하나만 덜렁 적혀 있는 걸 발견한 동료들은 내가 형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아들 하나, 혹은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동료들은 그런 내 상황이 좀 더 가깝게 다가온 듯했다.


“우리 애도 나중에 너처럼 이렇겠구나.......”


 지금이야 외동아들, 외동딸이 대세라고 할 정도로 많지만, 내가 나고 자란 7,80년대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대부분 형제가 하나, 혹은 둘씩 있어서 나처럼 형제가 없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 시절 동생과 함께 2인용 게임을 하는 친구나, 누구한테 얻어맞은 뒤 쪼르르 형이나 누나한테 달려가 일러바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동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썩 좋지가 않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거나 ‘부모가 오냐오냐 하고 키워서 무례한 사람’ 일 거라는 선입견이 팽배하고, 사회성이 좋지 않을 거라는 편견도 있다. 그래서 누가 묻지 않는 한 웬만하면 내가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얘기하지 않다 보니, 10년 넘게 같은 직장에서 일한 동료들조차 내가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


 외동아들, 그리고 외동딸에게는 숙명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는 숙명적인 외로움이다. 함께 자란 형제가 없다 보니 아무리 부모가 잘해준다고 해도 채워줄 수 없는 빈자리가 있다. 성장 과정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많고, 어쩔 수 없이 혼자 생각하거나 혼자 노는 시간이 많은데, 그때는 자신이 외로운 줄을 잘 모른다. 늘 혼자였기에 자신이 종종 느끼는 그 감정이 ‘외로움’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차 그것이 외로움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외로움을 즐기거나, 외로움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게 된다.

 또 하나는 숙명적인 책임감이다. 아버지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 중이실 때 간병인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병실의 노인들 중에 가족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사람은 십중팔구 자녀가 많은 사람이라는 거였다. 형제들이 많으면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서로 책임을 미루고 발길이 뜸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부모의 병원비를 누가 낼지를 놓고 형제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반면에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은 일을 미룰 사람이 없으니 모든 걸 당연한 자신의 일로 생각해서 더 책임감을 갖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가족들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개인의 성향도 다 다르니 이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이 부모님에 대해 책임감을 더 강하게 느끼는 건 맞는 것 같다. 혼자이니 누구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없는 게 사실이고,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관심을 오롯이 혼자 다 받고 자란 만큼 부모와의 일체감도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에 요즘 말로 ‘현타’가 온 건 대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는데, 어느 날 소설을 쓰다가 형제 얘기가 나오니 손이 멈춰버렸다. 소설을 쓰려면 주인공의 심리와 일체가 돼야 하는데, 형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사촌형제랑 비슷할까? 부모랑 비슷할까? 친구랑 비슷할까? 아니면 그걸 섞어놓은 어떤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추측조차 되지를 않았다. 한창 소설을 쓰고 있던 나는 거기에 꽉 막혀버려 더 이상 글이 나아가지를 않았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 형제가 없는 나는 인생의 한 부분을 살지 못한 거구나!”


 외동아들로 살아오면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그 경험이 꽤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이건 매우 큰 결격사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담을 한 채  형제가 있는 친한 친구에게 이 얘기를 했는데,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또 다른 말로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나는 형 때문에 인생의 많은 부분을 살지 못했어!”


 아버지 빈소에서 상주는 나 혼자였지만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일흔 살이 넘은 다섯 이모들은 장례일정 내내 상복을 입고 엄마 곁을 지켰다. 49재를 치르는 동안에도 7주 동안 매주 한 번씩 하는 재를 한 번도 빠짐없이 찾아와 자리를 지켜주었다. 지금도 이모들은 매일같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와 몇 시간씩 수다를 떤다. 이모들끼리 매일 싸우고 삐지고 뒷담화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서로 아플까 봐 걱정하고, 누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 싸웠냐는 듯 모여서 함께 힘을 모은다. 이모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워낙 많으니 엄마가 혼자 외로울 틈이 없다. 엄마에게 형제들은 가장 가까운 평생의 이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외동아들, 그리고 외동딸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형제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인간관계를 배우고 사회성을 기르는 데 있어서 형제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다고 본다. 나이가 들어 형제끼리 교류가 뜸해지고 사이가 전 같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나의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 힘들었던 성장통을 기억해주고,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일 수 있다. 물론 이웃사촌보다 먼 형제도 있고, 남보다 못한 형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피를 나눈 평생의 친구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라도 한 건 아예 그런 기회조차 없는 것보다는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외동인 자식에게 형제를 만들어 줄 수 없는 부모들에게는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외동으로 살아보니, 남들보다 빈자리가 많은 만큼 채워 넣을 수 있는 것도 많다. 혼자인 시간은 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잘 성숙하게 해 줄 수 있으니, 다들 외동이라고 너무 편견은 갖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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