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S.E.S. 숙소 앞 '유진' 누나의 추억 (FT.신화창조)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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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S.E.S. 숙소 앞 '슈' 누나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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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997년 11월 28일>
16화.
누나들의 마지막 숙소가 된 청ㄷ빌라에서의 에피소드는 참 많았다. 청ㄷ빌라를 마주 보고 있던 바로 앞 단독 주택에 살고 계시던 가족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특히나 그 집 따님은 우리에게 늘 잘해주셨다. 그때 우리의 나이가 전부 10대들이었고 많아봤자 스무 살을 갓 넘긴 팬들이었는데 그 집의 따님은 먼저 늘 인사를 해주시곤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지금 와서 참 죄송스러운데 우리는 청ㄷ빌라를 마주 보고 있던 그 단독 주택 담벼락(대문 옆)에서 누나들을 기다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 담벼락 앞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아이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그 단독 주택의 따님은 항상 밝게 웃어주시며 인사를 받아주시고, 먼저 해주시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의 그 집 따님은 당시에 아마도 20대 중반에서 후반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항상 저녁 6시에서 8시 사이가 되면 그 집 따님의 아버지가 들어오시곤 했다. 나는 그때 처음 보게 되었다. 드라마에서나 봐왔던 운전기사를 말이다. 무슨 차였더라? 벤츠였나? 그랜저였나? 브랜드나 모델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고급 세단인 건 확실하다. 항상 그 시간이 되면 고급 세단의 차량이 그 단독 주택의 앞, 그러니까 우리들 앞에 정차했고 운전기사님이 뒷좌석에 앉아 계신 그 집의 아버님을 내려주신 기억이 있다. 벌써 20년이 넘는 그날의 기억이자 추억이지만 빛이 바래지 않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항상 양복차림이셨고 뭐랄까...? 굉장히 포스가 있으신 분이었다. 인사를 종종 드리긴 했는데 항상 고개를 한 번씩 끄덕거려주셨다. 주말에 누나들을 기다릴 때면 그 단독 주택의 아버님은 골프를 하러 나가셨다. 역시나 운전기사님이 오셔서 뒷문을 열어주시는 건 물론이고, 골프채를 트렁크에 실어주셨다. 이런 게 드라마에서나 봐왔던 회장님의 모습인 건가...? 하고 늘 생각했다. 우리끼리도.
그렇다고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골목을 휘젓고 다니지는 않았다. 절대로. 항상 조용하게 누나들을 기다렸다. 아마도 그런 점 덕분에 우리가 혼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지금 만나도 종종 그때의 그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그때 그 단독 주택에 살던 따님 기억나지? 정말 잘해주셨는데"
라고 말이다. 어쨌든 청ㄷ빌라에서의 추억 중 한편에는 우리에게 늘 잘해주셨던 그분의 모습이 선명히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누나들이 스케줄이 없을 때였나? 중간고사였는지 기말고사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7호선을 타고 강남구청 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명의 친구들과 누나들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장 빨리 끝나서 교복을 입은 채 청ㄷ빌라로 향했던 것. 평일이었다. 청ㄷ빌라 앞에 도착하니까 나 혼자 밖에 없었고 시간은 아마도 정오에서 1시 사이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의 휴대폰은 스마트폰이 아니었고 2g 폰이었으며, 카카오톡 같은 무료 메신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때였다. 오직 문자 또는 전화가 전부였던 새천년.
[어디야? 빨리 와! 심심해]
만나기로 한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혼자서 대충 2시간쯤은 기다렸던 것 같은데 참 심심했던 기억이 있다. MP3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 막 보급이 될 때라서 상당히 고가를 자랑하던 기계였다. 디지털카메라, 일명 디카도 새천년쯤에 막 보급되기 시작했고 역시나 디카의 가격 또한 엄청난 고가의 카메라였다. (처음에 디카를 봤을 때의 그 신기함이란......) 그렇다고 CD 플레이어도 없었다. 내가 CD 플레이어를 갖게 된 건 열여덞? 열아홉 쯤이었으니까. 누나들의 앨범을 CD로 구매하긴 했지만 늘 컴퓨터로 듣던 그때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혼자 청ㄷ빌라를 마주 보고 있던 그 단독 주택 담벼락 앞에 쪼그려 앉아 있기를 한 시간? 갑자기 유진 누나가 나왔다. 1:1로 마주친 것이다. 이미 5,6천 명이 넘는 S.E.S. 최초 공방파이면서 최대 공방파였던 <요베>(요정 베이커리)의 시샵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1:1로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회원들을 인솔하기에 늘 정신이 없던 나는 그날,
'아, 왜 지금 나오는 거야...'
라고 혼자 생각하며 순식간에 샤이 보이가 되어버렸다. 아직도 기억난다. 유진 누나는 나를 발견했고 나는 유진 누나를 발견했을 때의 그 날 그 시간. 정말 내게 있어서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1:1로 마주쳤다면 덕질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게 또 막상 눈앞에 벌어지게 되면 부끄러워진다. 서울, 인천, 수원, 안산, 대구, 마산 등을 찾아다니며 그렇게 덕질을 해왔건만 그때 나는 왜 유진 누나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걸까?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기 그지없던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는 S.E.S.로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더 가까이하고 싶어도 가까이할 수 없는 나의 아이돌이자 연예인이었으니까.
"안녕?"
"안녕하세요 누나"
유진 누나가 먼저 인사를 해준 날이었다. 누나는 당연히 기억을 못 하겠지만 그랬던 날이다. 어쨌든 그렇게 유진 누나는 내게 먼저 인사를 해준 뒤에 본인 차량을 타고 숙소를 떠났다. 하얀색 소나타 EF. 유진 누나의 자동차였고 차번호는 1779. 숙소 좀 다닌 팬이라면 유진 누나의 차 번호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유진 누나의 팬이었던 '적향루진' 누나의 휴대폰 뒷번호는 1779였다. 유진 누나는 알까? 이런 팬들이 있었다는 걸? 그렇게 유진 누나를 보내고 한 시간쯤 뒤였나? <요정 베이커리>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왜 이제 와! 얼마나 뻘쭘했는데"
"언니 나갔어?"
"누나 어디 간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혼자서 그걸 어떻게 물어봤겠는가? 내 심정도 몰라주던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 그날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다. 바다 누나가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고 유진 누나는 이미 나갔으니까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아마도 숙소를 벗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맥도날드 청담점에 가서 놀았거나 로데오거리 좀 걷다가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맥도날드를 갔거나, 아니면 정성본 칼국수를 먹으러 갔거나 했을 것이다.
2001년의 여름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이었고 누나들은 SBS 인기가요 스케줄에, 과천 서울랜드 야외 광장에서 있을 라디오 공개방송 스케줄이 연속으로 있던 날이었다. SBS 인기가요가 지금 하고는 다르게 5,6시쯤에 끝났을 것이다. 서울랜드 스케줄이 7시였나? 8시쯤 있던 걸로 기억한다. 인기가요를 뛰고 서울랜드까지 공방을 뛰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도 무리였다. 5호선 발산역(거의 끝)에서 4호선 아래쪽에 있는 대공원 역(서울랜드)까지 지하철을 타고 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무리한 팬질이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갈 수는 있다. 갈 수는 있는데 덕질의 기본 중 하나는 자리를 먼저 맡아야 된다는 것이다. 서울랜드에 도착하면 이미 다른 팬들이 자리를 맡고 있는 건 물론이고, 그날 서울랜드를 찾은 일반 시민들도 많았기 때문에 우리가 앉을자리를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으니까.
그래서 <요정 베이커리>는 서울랜드를 선택했다. 그런데 세 명의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인기가요를 굳이 뛰고 오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들이 바로 '수영 유치원', '유진 낭자' 그리고 '욱이'(닉네임은 기억나지 않고 이름이 기억나는 아이러니함)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오빠, 나하고 '유진 낭자' 오빠하고 '욱이' 오빠는 인기가요 뛰고 바로 넘어갈게!"
그렇게 '수영 유치원'과 '유진 낭자', '욱이'는 결국 인기가요 생방까지 뛰고 오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일찍이 도착한 나와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놀이기구를 타면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저녁 7시쯤 시작이었기 때문에 서울랜드 야외 광장은 아직까지 텅텅 비어 있었다. 점점 공개방송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야외 광장 위쪽에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고 그때 같이 나오는 가수들 중에서는 신화도 있었다. 신화와 처음으로 활동이 겹치는 시기였고 워낙 누나들과 신화 형들이 친했기 때문에 신화창조와 우리의 사이도 굉장히 친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유대감이 깊었으니까. 점점 신화창조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일반 시민들도 여기저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6시? 공연 시작 거의 30분 전? '수영 유치원'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우리 서울랜드 입구야!"
대박이었다. 30분 정도를 남겨두고 서울랜드 입구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덕질은 이런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세상에 안 될 건 없다. 그 전화를 받고 나와 '까꿍 유진'은 마중을 나갔는데 이럴 수가.
"설마 너네 셋이서 지금 단체복(우비)을 입고 온 거야?"
"어, 우리 이거 발산역부터 입고 왔어!"
혼자서는 못 입었겠지, 다들 10대였고 S.E.S. 에 미쳐 있었으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한 시간이 넘는 그 일촉즉발인 상태에 지하철 안에서 보라색 단체복(우비)과 보라색 풍선을 그대로 들고 탔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뭐 신기한 광경을 제공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세 명의 자리는 우리가 미리 맡아놨기 때문에 앉는데 문제는 없었다. S.E.S. 팬클럽은 우리 <요정 베이커리>를 포함해 그래도 20~30명 정도는 왔던 걸로 기억하고 신화창조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야외 광장의 반 이상을 신화창조가 앉아 있었으니까. S.E.S. 가 나올 때는 20~30명인 우리의 함성보다 신화창조의 함성이 더 컸던 게 웃픈 현실. 그날 김경호 역시 무대에서 공연을 했는데 김경호의 팬클럽? 그렇게 보이는 여성 팬 세 명이 광장 중간에 딱 앉아 있었던 게 선명히 기억난다. 정확히 세 명. 그 세 명의 김경호 팬들은 아무런 응원봉이나 현수막, 플래카드도 없이 김경호를 응원했는데 그것은 헤드뱅잉이었다. 김경호가 노래를 부르는 4,5분 동안 세 명의 여성 팬들은 광장 중간에서 일어나 머리를 신나게 흔들어댔고 그 광경은 우리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도 S.E.S. 를 덕질하고 있었지만 김경호라는 락커의 팬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긴 생머리를 흔들며 헤드벵잉을 하는 모습을 본 순간, 덕질의 세계, 덕후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신화가 4집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고 짐승돌로 잘 나가던 시기여서 엔딩은 역시나 신화가 주인공이었다. 그때 한참 팬픽이 유행을 타고 있었고 신화 내에서 민셩이라는 커플(이민우, 신혜성)이 꽤나 유명했는데 멤버들도 이미 알고 있는지 그날 무대에서 민우 형이 혜성이 형을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신화창조의 함성은 뭐 서울랜드가 떠나갈 정도였고 어쨌든 서울랜드의 공방 역시 재밌는 추억으로 남게 되는 순간이었다.